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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④ 영도대교- 현대와 근대를 잇는 역사의 다리..
기획/특집

④ 영도대교- 현대와 근대를 잇는 역사의 다리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5/12/01 17:12 수정 2016.04.21 17:12
근현대사에 기록될 서민ㆍ피란민 애환 간직한 영도대교

신(新) 부산여행 지리지④

영도대교

부산이라고 하면 대개 해운대 해수욕장이나 태종대 공원을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나 부산에 휴가를 즐기러 가서 이런 장소만 찾는다면 부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최근 들어 부산이 크게 변모하면서 새롭고 다양한 휴가지와 관광지가 많이 생겨났다. 경남지역신문협회는 경남도민의 여행과 휴가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부산시 후원을 받아 ‘신(新) 부산여행 지리지’ 시리즈를 시작한다.<편집자 주>


가난하던 시절 서민 애환 서린
우리나라 최남단 작은 다리


부산 대표 기념물로 지정 후
47년 만에 ‘도개교’ 재개통


재개통 행사에 7만여명 운집
매일 오후 2시 다리 들어 올려


오후 1시 무렵. 부산 중구에서 영도를 연결하는 ‘영도다리’ 아래로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젊은 부부와 청소년은 물론이거니와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까지 다양한 사람들이다. 부산 ‘영도다리’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정식 이름이 ‘영도대교’인 이 다리가 최근 다리를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도개교로 재개통했기 때문이다.

영도대교는 1934년 일제가 1천t 이상 대형선박 운항을 가능하게 하려고 내륙 쪽 다리 31m 30cm를 올릴 수 있게 만들었다. 당시에는 이름이 ‘부산대교’였지만, 부산 시내에서 영도로 가는 유일한 다리였기에 영도다리로 불렸다. 하루 최다 7회였던 도개 횟수는 시간이 흐르면서 줄어들었고, 1966년에는 차량정체 주범으로 몰려 도개가 중단되고 말았다. 

최근 들어 영도대교가 부산을 대표하는 기념물로 지정되면서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다 2013년 11월 도개 중단 47년 만에 영도대교는 다시 하늘로 들어 올려졌다. 재개통 행사에는 7만여명이 몰려 1934년 첫 개통 때 6만여명이 운집했던 역사적인 장면을 그대로 재현했다.

영도대교는 매일 오후 2시 도개 장면을 연출한다. 롯데백화점에서 영도대교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세월의 때가 가득 묻어 있는 약초방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영도대교가 시작하는 출발점 바로 옆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은 흰색, 회색 등으로 얼룩덜룩하다. 계단을 옛 모습 그대로 두면서 세월의 풍파로 닳은 일부분만 바꾸는 바람에 생긴 흔적이다.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영도대교 도개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에는 현대사를 고스란히 지켜봐 왔던 백발 어르신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다. 옆에는 이들의 과거를 담은 듯한 피란민 동상이 서 있다. 보따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는 가족의 모습이다. 이를 지켜보는 어르신들 지팡이와 돋보기안경, 깊게 팬 주름에서 이들이 살아온 세월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영도대교가 옛날처럼 다시 도개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십년 만에 영도대교를 찾았다는 안정래(75, 가명) 씨는 “붙어 있는 다리가 하늘로 올려가다니 얼마나 신기해. 옛날에도 사람들은 영도다리가 들릴 때마다 넋을 놓고 쳐다봤지. 우리나라 최남단에 있는 작은 다리였지만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라고 설명했다.
 
유명세는 한국전쟁 통에 더욱 높아졌다. 전쟁 당시 삶의 터전을 잃고 살기 위해 남으로 남으로 피란길에 나선 사람들은 인파에 밀려 가족 손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헤어지거든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우리나라 유일의 도개교였기 때문에 절대 길이 엇갈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영도다리는 ‘만남의 장소’가 됐다. 안 씨는 “실제로 여기서 만난 사람도 많다고 하더라. 근데 영원히 못 만난 사람도 있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영도다리에서 하염없이 가족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점집을 찾았다. 그 덕분에 영도다리 아래에는 점집이 성행했다고 한다. 그 많던 점집들은 지금은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길 한쪽에 ‘소문난 대구점집’이라는 작은 나무간판이 보였다.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간판 아래에는 ‘집 나간 사람을 찾읍시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 옆에 돗자리를 펴고 점을 봐주는 80대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옛날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지. 가족이 죽었나, 살았나 물어보곤 했어. 그때는 점집이 참 많았는데, 이제 나 혼자 남았네”라고 회상했다.

지금은 높은 건물이 들어섰지만, 이전에 영도다리 옆은 전쟁 이후 가난한 실향민들이 판자촌을 이룬 곳이었다. 성순둘(85, 부산 보수동) 씨는 “집에 있으면 피란민이 와서 재워 달라고 하거나 물을 달라, 밥을 달라고 했지. 힘든 시절이라 빨래를 널어두면 금방 없어졌어. 고추장 단지도 사라지고 그랬어. 밥 굶는 게 예삿일이었지”라고 옛일을 되돌아봤다. 가족을 잃고 힘든 삶에 시달리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최월성(81, 보수동) 씨는 교통사고로 자식 둘을 동시에 잃고 영도다리에 섰던 과거를 회상했다. 그는 “그때는 바닷물이 정말 맑았어. 밤에 뛰어내리려고 결심한 뒤 하루 종일 밥도 안 먹다 다리 위에 올라갔지. 바닷물이 배 불빛을 받아 출렁대는데 어찌나 무섭던지 뛰어내리지도 못하고 돌아왔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후 한동안은 영도대교에 가지 못했다고 한다.

영도대교 도개 15분 전인 오후 1시 45분이 되자 도개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영도대교 도개로 잠시 동안 다리를 건널 수 없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가 흘러나왔다. 눈가가 촉촉해진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오후 2시 무렵 도로가 꽉 찰 정도로 사람이 많아졌다. 교통이 통제되고 도개가 시작됐다. 천천히 올라가는 다리 모습을 보던 사람들은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구슬픈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 왔다. ‘굳세어라 금순아’부터 ‘이별의 부산정거장’까지 유명한 노랫가락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영도대교와 너무 잘 어울렸다. 다리는 15분 동안 천천히 올라갔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선박이 올려진 다리 사이를 지나갔다.

다리가 올라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안정래 씨는 “옛날에 얼마나 가난했던지 영도다리를 오가며 깡통을 들고 밥을 얻어먹었지. 그러다 돈을 벌기 위해 죽을 각오로 월남전에 참전했어. 그 덕분에 가족이 먹고살 수 있었던 거야. 월남전 이후에는 사업을 해 자식들을 키웠지. 그때 우리 인생은 정말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같았어. 지금은 월남전 고엽제 후유증으로 몸이 아파 서글프기도 그립기도 하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집도 있으니 백만장자인 셈”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도개가 끝나자 차들은 다시 영도대교 위를 달렸다. 사람들도 흩어졌다. 부인과 함께 벤치에 앉아 영도대교를 바라보던 안 씨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에게 영도대교는 우리나라 현대사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사였다.

경남지역신문협의회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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