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결하면서도 날렵하게 움직이는 붓을 따라 화선지에 먹이 스치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검은 파도가 일렁인다.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내려간 글에는 점과 선, 획에 묻어나는 먹의 농담이 화려한 미술 작품과는 다른 감동을 준다. 동시에 시원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야운(也雲) 신경찬(74) 선생만의 필체가 주는 힘이다.ⓒ
한학자였던 조부와 한의원을 했던 선친 밑에서 자란 야운 선생에게 서예와 한문은 일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려서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진 못해도 사서삼경과 논어 등 고전을 읽고 뜻을 헤아렸다. 때로는 어른들 필체를 흉내 내며 자랑하기도 했다.
그런 선생이 젊을 적 언론인 생활을 끝내고 서예가의 길을 걷게 됐다. 지역 원로 서예 애호가가 모인 양산서도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며 지역 서예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다.
전국에 단 3명, 서예 명인 칭호
선생은 양산을 대표하는 서예대전, 관설당서예대전을 구상해 2002년 첫 대회 때부터 4년간 운영위원장과 관설당서예협회장을 지내며 권위와 수준 있는 전국 규모 대회로 키워냈다.
그런 선생이 한국서화협회 명인으로 추대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지난달 30일 (사)한국서화협회(회장 우국정)가 주최한 제6회 대한민국서화예술비엔날레에서 명인 인증을 받은 것.
1986년 설립 이후 한국서화협회에서 인정한 명인은 야운 선생을 포함해 단 3명. 선생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부끄럽다며 손사래를 쳤다.
“명인 인증 받는 걸 알고는 ‘서예에 무슨 명인이 있나’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서예는 한도 끝도 없는 것인데…. 아직도 글을 익히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붓으로 유명한 분들이 저를 인정해주는 것 같아 기분은 좋지만 명인이라는 칭호가 한편으로는 마음에 걸립니다”
힘 닿는 때까지 글과 함께할 것
한결같이 겸손한 웃음으로 대화를 이어가던 야운 선생은 젊은이들이 꼭 익혀야 할 것이 서예라고 강조했다. 단순히 글을 쓰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글이 담고 있는 뜻과 내면에 담긴 철학을 이해함으로써 인성을 가꾸는 데 적합하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에 인성 교육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을 채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서예거든요. 낯선 고전 이야기를 익힌다는 게 어려울 수 있지만, 고전을 통해 선조가 세상을 바라봤던 시각, 사물을 꿰뚫어보는 통찰력 등을 배우면 세상을 사는 지혜도, 올바른 인성도 키울 수 있죠”
그래서일까.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재미’다. 서예를 흥미롭게 여기고 더 정진할 수 있도록 최대한 쉽고 인자하게 가르친다.
어려운 서체를 구사하기보다 기본을 탄탄하게 해 글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지역에서 후학을 양성한 지 20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선생에게 글을 배우고자 하는 이가 끊이지 않고 선생 밑에서 꾸준히 익혀가는 제자가 많은 이유기도 하다.
“가장 기본인 해서(楷書, 정서체)부터 시작해 행서(行書, 흘려 쓴 한자 서체)로 넘어갑니다. 행서보다 더 흘려 쓰는 전서나 예서는 가끔 써보는 별미로 두고 해서를 조금만 익혔다 하면 행서에 집중하게 합니다. 행서만 잘 써도 어디 가서 붓글씨 좀 쓴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글이 남으로부터 인정받으면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선생은 지금도 삼성동주민자치센터, 물금읍주민자치센터, 언양 등지에서 서예 강좌를 진행하며 시민에게 서예의 매력을 전파하고 있다. 선생은 가끔씩 체력의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고 말했지만, 서예야말로 심신을 맑게 한다는 걸 알기에 붓을 놓을 수 없다 했다.
“후학과 함께 글을 벗 삼아 살 수 있는 것은 제게 큰 행복입니다.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 제가 아는 것을 알려주고 같이 즐겁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