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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은 양산시립박물관 학예사 | ||
ⓒ 양산시민신문 |
또한 낙동강은 문화적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돼 있고, 조선시대 영남지역 최고 역인 황산역과 영남대로가 위치하면서 사통팔달 교통 요지로 일찍부터 교류와 교통 중심지로 자리 잡으면서 양산은 영남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주목받았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연경관이 좋은 곳, 햇빛이 잘 드는 곳, 자연재해 피해나 영향을 받지 않은 안전한 지역에 생활터전을 잡기 마련이다. 그러나 양산은 잦은 낙동강의 범람으로 넓은 습지와 같은 형태가 형성돼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비교적 범람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에 살기 시작했다.
이러한 까닭에 양산 선사 유적들은 주로 양산천과 회야강 주변에 집중 분포하고 있는데 이것은 낙동강 주변 하천으로 비옥한 평야 지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 일대를 중심으로 청동기시대와 삼한시대를 거쳐 마을을 형성하고 사람들의 집단생활이 시작되면서 선사문화가 자리 잡고 이 공동체가 정치적으로 성장해 삼한시대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지속해서 강화돼 초기 국가가 형성됐다.
선사시대는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 시대다. 즉 문자 기록이 아닌 남겨진 물건이나 건축물 등 흔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시대를 말한다. 구석기에서 청동기시대까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유물은 그 시대 과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유물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당시 자연환경, 생활모습 등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양산지역에 정확히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하북정 마을, 원동면 화제리, 상북면 외석리, 내석리 등에서 석기(石器)가 채집된 것으로 봐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 양산에서 신석기 유적지가 확인된 바는 없지만 양산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울주군 신암리 유적에서 빗살무늬토기와 융기무늬 토기가 출토되는 것으로 미뤄 늦어도 신석기시대부터 양산은 사람들의 생활무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선사시대 양산은 고김해만(김해평야가 바다였을 때)을 둘러싼 해수면 변동의 영향으로 오늘날 자연환경과는 상당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택지개발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주거지역으로 변모한 오늘날 물금지역은 과거 잦은 범람과 홍수로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었다.
실제 선사시대 유적도 물이 들지 않는 구릉이나 하천을 중심으로 한 평야지대 등 사람이 살기 윤택한 지역에서 확인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완만한 구릉에 있는 하북면 신평, 지산리, 순지리 등지에서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집자리부터 삼한시대 무덤까지 대거 확인돼 선사시대 양산 주거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받고 있다.
소토리, 신기리 등지에서 발견되는 고인돌[支石墓]은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이다. 현재 1~2기 정도가 남아있으나 과거에는 주변에 무리 지어 분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소토리에서는 청동기시대 집터부터 무덤부터 통일신라, 조선시대까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터전이 돼왔다. 특히 새빨간 홍도와 잘 다듬어진 석촉들은 우수한 양산 청동기시대 문화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양산 선사시대는 발굴조사를 통해 땅속 과거를 이해하고 해석해 얻어낸 결과물이다. 어쩌면 단편적 유적과 유물 존재만으로 양산의 선사문화 전체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고스란히 보존된 과거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일부 흔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다양한 성격의 유적들은 수천 년 전부터 양산의 독특한 선사문화가 형성 발전됐으며 지금 역사와 문화 도시 양산을 있게 한 발판이 아니었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