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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희 편집국장 | ||
ⓒ 양산시민신문 |
외로움에 방치한 어버이들
조롱과 모욕 아닌 이해부터
서로 존재를 존중하는 세상
어버이의 날에 함께 꿈꾸자
곧 다가올 5월 8일 어버이의 날을 앞두고 우리네 어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자못 씁쓸하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어버이연합’이라는 보수단체가 전경련 뒷돈을 받아 관제데모에 동원됐다는 의혹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청와대 연관설까지 나오면서 어버이연합을 둘러싼 의혹은 가벼이 넘길 수 없게 됐다.
어버이연합은 그동안 친정부 집회에 수시로 등장하며 때로는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과격한 언행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때마다 보수정당과 정부는 어버이연합의 과격한 시위를 묵인하거나 비호하는 태도를 취했다.
사실 어버이연합이 그동안 집회에서 주장한 내용이 옳고 그른가 하는 문제는 개인이 가진 판단 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주장을 관철하고자 어버이연합이 선택한 방식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어버이연합 논란이 커지자 급기야 젊은 세대들은 ‘후레자식연대’라는 이름으로 어버이연합을 조롱하고 있다. 당신 같은 어버이를 둔 적 없다며 당신들을 우리 어버이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첨예하게 드러나는 세대 갈등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한 셈이다.
개인적으로 어버이연합 논란을 바라보면서 겹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몇 해 전 부산에 있는 본가에 갔을 때 일이다. 집에 불필요해 보이는 물건이 하나둘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이 지내시는 집에 두루마리 화장지며 치약, 칫솔이 창고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아차 싶어 어머니에게 혹시 요즘 ‘약장사’ 구경 다니시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이전부터 노인을 상대로 다단계 판매를 하는 곳에 한 번씩 드나드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혹시 잡동사니가 아닌 큰 금액을 쓰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그치듯 캐묻자 어머니는 머뭇거리며 웬 서류를 하나 꺼내왔다. 300만원짜리 상조보험증서였다. 확인해보니 이미 노인 상대 사기업체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업체에서 발행한 증서였다.
순간 화가 나기도 했지만 잘못을 저지른 어린애처럼 눈을 맞추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 왔다. 자식들 모두 떠나보내고 직장까지 퇴직한 마당에 소일거리 삼아 드나든 곳에서 친절하게 당신을 대해준 젊은 사람들 말에 귀 기울였을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단돈 10원에도 지갑 열기 주저하던 어머니가 300만원이라는 큰돈을 선뜻 내줬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짐작이 갔다. 자식이랍시고 한 달 건너 한 달, 잠시 얼굴만 들여다보고 사라지는 모습을 어느새 남처럼 여겼을지 모를 일이다.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런 곳에서 파는 물건은 제대로 된 것이 별로 없으니 혹시 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꼭 나한테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마무리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눈을 피하며 “이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대꾸했다.
노인 사기 대부분은 ‘외로움’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장성한 자식들 대신 그들 말을 들어주고 그들을 이해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노하우라고 하니 자식 입장에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만큼 어버이를 외로움에 방치한 셈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 우리 어버이들은 유독 ‘하지 마라’는 말을 많이 한 것 같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키운 정 탓일까? 진자리를 피하라고 하는 말은 모든 어버이의 입버릇이다. 그런 어버이 밑에서 자라난 우리 역시 그들을 닮아 어버이를 향해 ‘하지 마라’는 말을 달고 산다.
날이 더우니 나가지 마세요, 날이 추우니 나가지 마세요. 스마트 폰은 사용하기 어려우니 몰라도 돼요, 요즘 애들 키우는 방법은 엄마 때랑 다르니까 간섭하지 마세요….
자식에게조차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어버이들. 어버이연합 집회에 참석한 어버이들이 단지 돈 때문에 그곳에 있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을 어버이라 인정하지 않는다며 스스로를 ‘후레자식’이라 이름 붙인 이들의 생각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어버이의 외로움을 이용해 사기를 치는 집단과 그들을 ‘진정한 어버이’라 치켜세우며 특정한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는 집단에게 분노할 뿐이다. 어버이 존재를 한낱 수단으로 전락시킨 진정한 후레자식들에게 분노한다. 그리고 그들을 외로움에 놓아둔 나에게 분노한다.
어버이의 날을 앞두고 어버이를 둘러싼 논란을 보며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떠올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내가, 어버이가 서로의 꽃이 되는 세상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