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삽량의 중심, 삼국시대의 양산..
오피니언

삽량의 중심, 삼국시대의 양산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6/05/10 09:49 수정 2016.05.10 09:49













 
↑↑ 이지은
양산시립박물관 학예사
ⓒ 양산시민신문 
양산지역 곳곳을 둘러보면 학교명에서부터 작은 가게 상호에서도 쉽게 ‘삽량’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삽량’이라는 이름의 어원을 찾아보면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산시와 관련된 본격적인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확인된다. ‘삽량(歃良)’과 관련한 최초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卷)45 <열전(列傳)>의 ‘박제상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박제상이 신라 눌지왕 2년(417), 삽량주간(歃良州干)에 임명됐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 권(卷)34 <지(地)>3 지리편에는 “665년(문무왕 5)상주(上州)와 하주(下州)를 합쳐 삽량주를 신설했다”고 했다. 신라시대 지명인 ‘삽량’은 지금까지 양산의 역사적 정체성을 계승하는 셈이다.


현재 물금IC, 남양산IC 등 4개 나들목이 관통하는 양산은 내륙도시 거점으로 교통 요지이자 물류센터가 집약돼 있어 영남지역 경제적 문물교류를 담당하는 중심지로 각광받고 있다. 그런데 이 양산의 지리적 환경은 1천5백년 전 삼국시대 삽량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삼국시대 양산은 지리적으로 신라 수도였던 경주의 남서쪽 입구에 해당하며, 황산강(지금의 낙동강)을 경계로 가야와 접하고 있었다. 때문에 신라와 가야의 문화ㆍ경제적 교류의 장이면서 교통 및 군사 요충지로 때로는 치열한 접전지기도 했다.


왕이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출정하기도 하고, 성(城)을 쌓아 방어하기도 했다는 기록은 당시 양산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충분히 입증하는 자료로 이해되기도 한다. 실제 순지리 토성을 비롯한 성황산성(신기산성), 북부산성, 오봉산 고장성 등이 도처에 산재하고 있다.


삽량은 신라 수도인 경주를 에워싼 경상도 중동부 지역에 걸쳐 있어 지리적 위치상 문화와 물류의 교류 현장이었다. 화려했던 신라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곳이 삽량이기도 하다.


특히 삽량시대에 축조된 고분군은 당시 양산의 위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며, 대표적으로 북정리ㆍ신기리 고분군은 신라와 가야를 품은 삽량만의 독특한 고분문화를 만들어냈다.


가령 외관상 독립 구릉에 일렬로 길게 나열된 고총들의 모습은 가야시대 왕릉급 무덤에서 볼 수 있는 경관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속에는 신라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부부총과 금조총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작은 금알갱이를 붙여 세공한 화려한 귀걸이는 화려했던 삽량 문화를 상징한다.


한편 하북 순지리 유적과 명곡동 유적이 입지한 구릉과 그 주변 일대는 삼국시대 사람들 중심 생활무대였다. 순지리는 청동기시대 유적군과 동일한 권역에 포함돼 있어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줄곧 인간생활 중심 무대를 이뤘으며, 명곡리에서는 동일 구릉 정상부에 취락과 무덤군을 형성해 당시 사람들 공간 활용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렇게 고대 삽량의 중심으로서 역사적 정체성을 이어온 양산은 현재 교통ㆍ물류ㆍ산업을 발전시키고 있는 해양과 대륙의 교차점으로 힘찬 도약을 하고 있다. 이는 화려했던 삽량 역사적 전통성이 지금의 양산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 중요한 근원이 아니었을까 한다.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