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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명주 원불교 교무 | ||
ⓒ 양산시민신문 |
내가 살고 있는 이곳만 해도 그렇다. 문밖만 나가면 외국인이다. 시장을 비롯해 곳곳 거리 간판도 한문이 주류를 이룬 곳이 꽤 된다. 만나는 사람도 절반 이상이 외국인이라면 과장일까?
지난 1일, 상암 월드컵 100주년 대회를 기해 원불교 ‘경산 종법사’가 하신 설법 중에서도 “국민을 넘어 세계시민이 됨이 필요하다”며 ‘세계 시민’에 대한 강조가 있었다. 세계가 이미 인터넷으로 하나가 돼 소통하고 있는 우리가 다시 우리 각 개인의 존재 정의를 ‘세계 시민’으로 다시 정립해야 할 시점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와 있는 것이다.
잘 아시다시피, 세계 시민은 세계와 시민이 결합된 말이다. 그 개념은 ‘특정 국가 국민으로서만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 일원으로서 세계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지구촌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하는 사람’을 세계 시민이라 한다.
‘시민’이 도시 또는 국의 구성원으로서 정치적 권리를 지닌 주체를 가리킨다면, ‘세계 시민’은 세계를 구성하는 개체로서 세계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는 입장을 기본으로 한다. 세계 시민은 어느 특정 국가나 집단의 관점에서 본 시민 자질에 국한돼서는 안 된다. 대신 국가를 초월한 반성과 참여, 연대가 강조돼야 한다. 세계 시민은 특정한 이해관계를 초월해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 행동하는 시민성을 갖춰야 한다.
세계 시민의 바람직한 예를 들면, 영국 변호사 피터 베네슨은 인권 문제 개선을 위해 국제 사면 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를 창설해 세계 평화와 인권 보호에 기여했다. 또 우리나라도 개발 도상 국가와의 상호 교류를 증진하고 경제ㆍ사회 발전을 지원하는 한국 국제 협력단(KOICA)를 운영하고 있다.
세계 시민으로서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살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아이러니하다고 할까 놀랍다고 할까 이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이 아닌가! 정말 묘한 일이다. 이러면서 하나의 각성이 생긴다.
이미 우리는, 더 정확히는 나를 포함해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는, 내가 다 인지하지 못해서 그렇지 원래 아주 밀접하게 연결돼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 본질에 접근하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행복진다.
이러하기에 마음이 가는 방향 즉, 삶의 목적은 ‘전체를 위하는 생활’으로 세우는 것이 세계 시민으로서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현재 내가 마주한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과, 모든 일들이, 설사 마음에 안들지라도 그럴 수 있음을 그대로 인정하고, 감싸안고 어제보다 더 나은 쪽으로, 더 밝은 쪽으로, 마음을 열어가기만 하면,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찬란한 빛과 내 안에 연결된 모두와 만나게 된다.
4살 손자 손을 이끌고 봉헌초에 불을 붙여 불전 헌배를 하시는 분에게, 늘 ‘나는 못한다’는 절망감에 시달려온 어느 청년에게,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깊은 자괴감이 찾아올 때, 난 조용히 묵상하며 읊조린다.
“이 우주에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이 오늘도 안전하고 편안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모두가 다 행복하게 모두가 몸과 입과 마음으로 합력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