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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대식 양산시 문화관광해설사 | ||
ⓒ 양산시민신문 |
각 지역마다 자랑하는 위인들이 있지만 우리 양산에서는 삼조의열을 으뜸으로 현창하고 있다. 삼조의열이란 신라시대 삽량태수 박제상 공, 고려조 양주방어사 김원현 장군, 조선조 양산군수 조영규 공을 아울러 이르는 것인데, 모두가 조선시대 직제로 군수에 해당한다. 군수는 지역 행정ㆍ사법ㆍ군사권을 다 쥐고 백성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자리였다.
그런데 우리는 삼조의열에 대해서는 많이 혹은 조금은 알고 있지만 ‘삼조의열’을 만들어 낸 또 한 사람, 이만도 군수와 그 경위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지은 ‘양주방어사 김 공 승전비명 병서’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양산 경계에는 왜적의 변란이 많아서 간간이 위인이 배출됐으니 신라시대에는 박제상이 있었고 조선조에는 조영규가 있었다. 다만 고려시대에는 알려진 인물이 없어 나는 일찍이 한탄했다. 김영표라는 자가 (중략) ‘나의 조상이신 휘 원현은 고려 문종 때 양주방어사가 되셨는데, 왜적의 선박 190척이 삼차강을 따라 본 고을로 다가오자, 공은 전투복을 단정하게 입고는 긴 칼을 휘두르며 수만개의 수급을 베었다. (중략) 한 마디 비석에 고쳐 새길 말을 주시기 바란다’고 했다. 나는 말하기를 ‘그런 고려 사람이 있었구나! 박공과 조공은 충성으로 알려졌는데 공은 공훈으로 알려졌으니, 가히 시대마다 사람이 없지 않았다 하리라’고 했다”
아주 멋진 스토리텔링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3이라는 숫자, 일본이라는 공통점으로 임팩트, 문무의 안배, 백성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군수 삼조의열 세트가 탄생한 것이다.
이만도 군수는 경북 안동 출신인데 퇴계 선생 11세손으로 자신으로부터 위로 3대가 과거 급제, 아래로 3대가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24세 장원급제 이후 10여년간 성균관, 병조, 사간원, 홍문관, 사헌부 등에서 요직을 맡았다. 1876년 강화도조약 때 지부상소를 한 최익현을 두둔하다 관직이 삭탈됐다가 양산군수로 좌천됐는데 이것이 양산군민에게는 큰 복이 됐다.
이해 흉년이 들자 자신의 녹봉을 털어서 주린 백성을 구휼하고 사창미를 방출했다. 이듬해 큰물이 나서 백수십호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구휼미를 방출하고 세금을 감면해줬다. 원동 가야진사에 있는 이만도 군수 영세불망비에는 ‘전례에 없이… 봉록을 덜어 혜택을 베푸셨네’라고 새겨져 있다.
이때 인연으로 퇴임 후 이만도 군수는 이양산(梁山) 또는 양산영감으로 불렸다.
이후 중앙에서 요직을 역임하고 낙향해 후학 양성에 힘쓰던 중 1895년 국모 시해 사건 때는 의병장으로, 1905년 을사늑약 때는 을사 5적 처단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은거하다 드디어 1910년(68세) 경술국치를 당하자 단식을 결행해 24일 만에 순절했다.
나라가 망할 때 선비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외적에 힘으로 맞서거나, 은거해 지조를 지키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이 있겠지만 어느 한 가지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요 흔히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 세 가지를 모두 행했다.
양산 출신도 아니요 재임 기간도 채 2년이 안 되지만, 조상들의 우수한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다시 한 번 스무살 청년 양산의 대도약을 준비하는 ‘양산정신’ 근간이자 표상인 삼조의열을 탄생시킨 이만도 군수이기에, 시 승격 20주년과 인구 30만 시대를 맞아 그를 기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