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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대식 양산시 문화관광해설사 | ||
ⓒ 양산시민신문 |
위의 분들을 비롯해 잘 알려진 양산 인물들은 거의 다 일본과 관련이 있다. 대표적으로 양산 정신 근간으로 추앙받는 삼조의열이 그러하다. 삼조의열이란 신라 시대 박제상 공, 고려 시대 김원현 방어사, 조선 시대 조영규 군수를 아울러 이르는 것이다.
지난달, 이 난(欄)에서 소개한 바 있는 ‘양주방어사 김 공 승전비명 병서’도 ‘양산 경계에는 왜적의 변란이 많아서…’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런데 삼조의열이라는 격에 비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가 김원현 장군인 것 같다. 우선 병서(幷序)의 앞부분을 보자.
“양산 경계에는 왜적의 변란이 많아서 간간이 위인이 배출되었으니 신라 시대에는 박제상이 있었고 조선조에는 조영규가 있었다. 다만 고려 시대에는 알려진 인물이 없어 나는 일찍이 한탄하였다. 김영표라는 자가… ‘나의 조상이신 휘 원현은 고려 문종 때 양주방어사가 되셨는데, 왜적의 선박 190척이 삼차강을 따라 본 고을로 다가오자 공은 전투복을 단정하게 입고는 긴 칼을 휘두르며 수만 개의 수급을 베었다. 나는 ‘그런 고려 사람이 있었구나! 박공과 조공은 충성으로 알려졌는데 공은 공훈으로 알려졌으니, 가히 시대마다 사람이 없지 않았다 하리라’고 하였다…”
혜성처럼 나타나 양산 대표 위인으로 등장한 것이다. 낙동강은 일찍부터 바다와 내륙을 연결하는 통로였기에 고려 초부터 낙동강 수계를 통한 왜구 침입이 있었고 따라서 낙동강 입구에 있는 양산은 지리적ㆍ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고려 시대에는 방어사를 둬 왜구 침구를 물리치게 했고, 고려 말 왜구 침입이 극성을 이룰 때는 양산지역을 일시 폐쇄하기도 했다. 고려 말 왜구의 침구는 극심했다. <고려사>에는 이 시기 왜구 침구 기사가 수없이 나오며 양산에 침구한 왜구에 대한 기사도 적지 않다.
이 시기 왜구의 폐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약탈, 납치, 살육, 방화, 파괴 등 직접 피해도 컸지만, 파생적인 피해는 더 심각하고 파괴적이었다. 조운(漕運) 차단으로 인한 국가 재정 고갈과 왜구를 피해 해안에서 70리 안쪽으로 이주하게 함으로 경작지 황폐와 기근과 유망에 따른 조세 수입 감소는 국가 기능을 마비시켰다.
왜구 침구는 경작 포기-백성의 유망-기근-아사-농업 인구 감소-농업 생산 감소-국가 조세 수입 감소-국가 기능 마비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시작점이었다. 또한 무리한 병사 동원과 축성 인력 등 동원은 결국 민심 이반으로 이어지고, 이성계 등 무인 세력의 권력 강화로 고려의 멸망으로까지 치닫게 된다.
이러한 때 낙동강을 통해 양산으로 침구해오는 왜선 190척을 격멸한 장군의 공은 엄청난 것이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기록이 부족해 장군의 생몰년도 알 수 없고, 과거 급제 시기, 방어사가 된 시기, 왜구를 물리친 시기 등에도 여러 이설이 있다는 점이다.
연대로 보아 과거 급제 기록의 김원현과 왜구를 물리친 김원현이 동명이인이라고도 하고, 왜구의 출몰시기로 보아 장군이 물리친 것은 왜구가 아니고 무장한 왜의 상단(商團)이라고도 한다. 또 기록 오류라고도 한다. 양산을 대표하는 ‘삼조의열’이라는 위상에 맞는 대접을 못 받는 것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비명(碑銘)의 마지막은 ‘…빛나는 양산의 들녘이여… 양주방어사 김 공은 우리나라 역사서에 길이 기록되리라’라는 말로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