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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아 시인 양산문인협회 | ||
ⓒ 양산시민신문 |
그러나 이 생각 때문에 우리는 대상을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이런 배제ㆍ부정의 원리가 ‘생각’의 본질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실제 삶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여겨온 것일까? 왜 ‘정신’이 우리의 ‘몸(존재)’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것은 소크라테스 제자 플라톤의 영향에 힘입은 바 크다. 플라톤은 스승이 자기 생을 걸고 지키려 했던 앎, 그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다양한 학문, 다양한 분야를 걸쳐 여러 방식으로 연구해나갔다. 그 끝에 도달한 것이 최고의 선과 미(美)라고 할 수 있는데, 플라톤은 이것을 이데아(idea) 혹은 에이도스(eidos, 形相)라고 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도달하려는 이데아, 즉 생각이란 무엇일까?
빵을 만드는 상황을 상정해 보자. 빵을 만들 때 필요한 것은 밀가루와 빵 모양을 잡아줄 그릇(틀), 그리고 그것을 만들 사람(제작자)이다. 제작자가 밀가루 반죽을 그릇에 담아 불에 익힌 다음 그릇을 꺼내면 일정한 형태의 빵이 만들어져 나올 것이다. 이때 빵은 그릇(틀) 모양을 갖게 된다. 이 모양(형상)을 생각의 형태로 저장한 것이 이데아(idea)다. 플라톤은 이 이데아가 불변의 진리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 가치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이 볼 때, 변화무쌍하며 불규칙한 사건들로 이어지는 현실에서는 참된 진리를 찾을 수 없다. 모양도 빛깔도 각양각색인 꽃은 계속해 변하고 있기에,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고 그러니까 ‘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달리 형상, 이데아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꽃이나 빵, 그리고 그것들은 만지는 사람(제작자)은 세월 가면 형태가 변하고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머릿속에 저장된 형상은 영원히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플라톤은 불변의 이데아(생각=정신=이성=관념)가 참된 진리(앎)이며, 이것이 인간 영혼을 선하고 아름답게 하고 보존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추상적 관념(觀念)의 다른 말 개념(槪念)을 떠올려보자. 한자어 개(槪)는 ‘평미레질하다, 누르다, 억압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됫박에 쌀을 붓고, 정확히 한 되가 되도록 여분의 것을 깎아버린 것, 공통의 틀 속에 들어가는 것, 일반적인 것만을 생각의 형태로 저장한 것이 바로 개념이다. 허나 됫박 안에 고정된 쌀처럼, 제한된 개념으로는 결코 세계를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틀(이데아=관념)에 박힌 생각으로는 나도 너도 세상도 변화할 수 없다.
우리가 개념을 이해하는 일을 ‘파악(把握)’이라고 할 때, 파악 또한 결코 긍정적 의미만을 갖고 있지 않다. 손으로 꽉 잡아 쥐는 것, 손에서 빠져나간 것은 포기하고 남겨진 것을 생각의 형태로 저장한 것, 이것이 파악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데아(idea)=관념(생각)=개념’은 처음부터 갇혀 있는 것이고, 나/너 및 세계를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하는 것이고, 출발부터 소유의 상태이고, 시작부터 제한돼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알려고 생각할 때, 그때 ‘생각’하는 그 대상은 실재가 아니라, 추상적인 것 허망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삶의 진리는 추상적인 것, 저기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 실재하는 세계, 살아 움직이는 일상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도 이 ‘생각’ 때문이며,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단절되는 원인도 바로 그 ‘생각’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idea)의 틀을 깨는 것이다. 생각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있는 그대로의 사물, 혹은 ‘나/너’가 보일 것이며, 세상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생각’ 그 자체에 대한 근원적 반성, 이것은 오늘날 불통ㆍ단절의 시대에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