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김순아 시인 양산문인협회 | ||
ⓒ 양산시민신문 |
1755년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이 그 계기로 작용했다. 지진을 목도한 사람들에게 신은 더 이상 정의롭지 않았고,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성경대로 살려 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신의 권위는 추락하게 된다. 헤겔은 이러한 시대를 ‘역사의 종말’이라 명명하며, 절대이성을 통해 인간의 신성을 복원하려 했다.
헤겔은 인류 역사에는 절대이성이 있고, 절대이성이 역사를 어떻게 움직여왔는가, 이것이 역사를 결정짓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계사를 절대정신(이성)이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하고, 인간의 역사 역시 변증법적 발전을 겪는다고 말한다.
변증법은 테제(these)와 반테제(anti-these)가 서로 모순을 만들고 지양될 때 도출되는 신태제(synthese), 이른바 정반합 논리를 말한다. 이를테면, 한 사람이 어떤 문제를 생각할 때, 거기에는 허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럼 그 허점을 지적하는 다른 사람 의견도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다양한 생각들을 모으면 새로운 논의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 더 이상 수정될 수 없는 가장 높은 위치의 이성이 나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변증법이다.
헤겔이 변증의 논리를 통해 지향한 것은 국가, 종교, 철학을 아우르는 하나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념과 현실(혹은 내용과 형식)의 완전한 합치를 통해 이뤄지는 전체 동일성의 논리(변증법) 말이다. 사실 이것은 고전철학자들의 주요관심과도 다르지 않다. 고전철학자들이 가졌던 관심도 인간성의 신성 또는 신성의 인간성이었다. 인간과 신을 하나로 일치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고전철학이 추구한 인간의 신성은 단지 이상일 뿐 현실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고대 그리스 신들의 조각형상에는 (정)신성을 표현하는 무엇이 없다. 신의 형상은 그저 조각(틀)로만 남아있다. 이때 신은 사람들의 내적 공감을 이루지 못하고 오직 경외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게 된다. 이를 두고 헤겔은 주관성의 현실성이 없다고 말한다.(헤겔, 두행숙 옮김, 1996)
헤겔이 보기에 인간과 신성의 관계는 아직 합치되지 않았다. 신성을 표현하는 인간의 모습은 너무나 이상적이고,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기에만 좋았을 뿐이다.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은 뚜렷이 구별돼 있어, 인간의 역사와 신적인 것의 공통성은 끊어져 있고 정신적 소통은 이뤄지지 않았다.
헤겔은 그 소통, 혹은 합일의 방식을 예수의 초상에서 찾는다. 예수를 표현하는 문제는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을 어떻게 보이도록 하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육체(그릇)에 어떻게 ‘(정)신(=idea)’을 담아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헤겔은 그것을 예수의 눈빛을 통해 설명한다.(이지훈, 2008)
즉, 인간의 심정이나 마음이 아무리 내면적인 것이라 해도 눈빛이나 표정 또는 목소리 말 같은 육체적 요소를 통해 드러날 수 있으며, 이때 신과 인간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러한 내적 일치를 화해의 계기라고 부른다. 화해(和解)라는 한자는 서로 꼬이고 엉킨 것을 푸는 행위와 관련된다. 오해가 잘못 푸는 행위라면 화해는 함께 더불어 잘 풀어내는 것이다.
헤겔이 신과 피조물의 화해를 말할 때, 그것은 마치 남자와 여자가 만나 자식(아들)을 낳고, 그것이 계속 이어지면서 전수되는 ‘아버지-정신’과 ‘아들-정신’이라고 해도 좋을 법하다. 자기 정신에서 ‘아버지-정신’을 깨닫는 ‘아들-정신’, 그리고 아들 속에서 자기 정신을 확인하는 ‘아버지-정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화해 말이다. 이것을 달리 말해 변증의 논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화해, 혹은 변증의 논리는 예수의 얼굴이 유럽사회에서 문화적 동일성의 중심이 되는 ‘주체’ 개념을 형성하는 중대한 계기가 됐다. 모든 낱낱의 개체정신들이 보편정신으로 동일화(하나)되는 것, 여러 타자가 내적 동일화를 이루는 어떤 보편적인 ‘정신’, 이것을 예수라고 해도 좋고 대문자 주체(=I)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동일화 논리가 차후 ‘서양=인간=남성=백인’이외의 것들을 배제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