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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윤현진 선생을 전시하다
오피니언

윤현진 선생을 전시하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6/08/30 09:44 수정 2016.08.30 09:44













 
↑↑ 박일웅
양산시립박물관 학예사
ⓒ 양산시민신문 
윤현진을 친다. 키보드로 윤현진을 친다. 그 유명한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검색결과 아름다운 유명 여자 아나운서 사진과 프로필이 먼저 등장한다. 동명이인 소개란에는 지휘자가 차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양산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을 지낸 윤현진 선생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해 들어온 온라인의 바다에서 ‘윤현진’이라는 이름은 이미 다른 사람이 선점하고 있었다. 적어도 인터넷에선 그랬다.


우리 민족경제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셨던 백산 안희제 선생을 친다. 키보드로 안희제를 친다. 바로 백산 안희제 선생 일대기와 사진, 업적이 소상히 소개돼 있다. 다시 윤현진을 친다. 또다시 나온 미모의 여자 아나운서를 뒤로하고 마우스 스크롤을 내린다.


마우스 스크롤을 맨 아래로 내리고 각종 지식백과 코너에 드디어 내가 찾던 우산 윤현진 선생에 대한 프로필이 나온다. 30세 젊은 나이에 조국 독립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다 이역만리 중국땅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야 만 아름다운 청년 윤현진이 드디어 나온다.


윤현진 선생은 의외로 안 알려진 독립운동가이며 아웃사이더다. 적어도 인터넷에서는 그렇다. 왠지 짠하다. 그는 무얼 바라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을까? 그는 당시 최고의 엘리트였다.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다녔고 집안도 매우 부유했다. 그런 그가 어머님이 기다리는 고향 양산에 들르지도 못하고 이역만리 중국에서 왜 그 힘든 임시정부 활동을 했을까? 왜?



당시 일본이라는 기득권에 안주했다면 그는 부유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무엇이 그를 격동의 시기에 독립운동이라는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세파에 몸을 던지게 했을까? 적어도 이 유명 포털사이트 인물정보에 소개되려고 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양산시는 우산 윤현진 선생의 뜻을 알고자 학술용역을 실시했다. 그러던 와중 선생의 손자분이 우산 선생 관련 유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윤현진 선생 선양사업과 관련한 일을 양산시가 추진하는 것을 알고 그 유품을 아낌없이 양산시립박물관에 기증했다.


양산시립박물관에서는 광복절을 맞아 한 달 동안 우산 윤현진 선생 유품을 최초로 공개 전시한다. 적어도 양산시민에게는 그가 독립운동의 주류이며, 메이저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선생의 기운이 어린 손때 뭍은 뿔도장에 쓰인 “右山(우산)”이라는 호가 잘 보이도록 돋보기를 준비하고, 보고 싶던 어머님을 위해 정성을 다해 써내려간 친필 편지를 바르게 받침대에 펼친다.


영광에 빛나는 건국훈장을 걸고 훈장증이 잘 보이도록 조명을 비춘다. 그를 기리기 위해 1959년 기념비제막식에 직접 쓰인 경봉 스님 추도사와 해석 본도 검은색 받침대에 정연하게 올려놓는다. 그리고 마른 체구에 엄정한 얼굴을 하고 멋진 슈트 맵시에 넥타이로 한껏 멋을 부린 선생의 가장 시크한 사진을 찾아 설명패널과 함께 디자인하고 제목을 이렇게 쓴다.

양산의 위대한 독립운동가 우산 윤현진(右山 尹顯振)

그 아래 설명문 내용은 이렇다.

우산(右山) 윤현진 선생(1892~1921)은 경남 양산 상북 출생으로 1912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법과에 입학, 법률 공부를 계속하면서 신익희, 김성수, 장덕수, 송진우 등과 함께 ‘조선 유학생 학우회’와 ‘조국광복동맹결사단’을 조직해 국권 회복운동을 전개했다.


1914년 고향으로 돌아와 안희제의 백산상회에 입회하여 투자하고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하는 한편, 양산 지역에 의춘학원(宜春學院)을 설립, 후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고향인 양산에서 만세 시위운동에 적극 가담하다 상하이로 망명해 이시영, 이동녕, 김구, 노백린, 여운형, 신익희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 설립을 위한 재정문제 해결에 힘썼다. 특히 당시 거액에 가까운 사재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어놓아 실질적 정부수립에 기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 뒤 임시정부 재무차장과 내무위원을 역임하다 1921년 9월 30세의 젊은 나이에 급병으로 세상을 떠나 상하이 정안사 외인묘지에 안장됐다가 1962년 건국공로훈장에 추서됐으며, 1995년 6월 23일에야 대전 국립묘지로 안장됐다.

비록 전시된 유품들에서는 장황한 설명문으로도 말할 수 없는 선생의 기운이 넘쳐흐른다. 적어도 양산시민이라면 박물관을 찾아와 윤현진 선생 유품을 관람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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