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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아 시인 양산문인협회 | ||
ⓒ 양산시민신문 |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안전지대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만성폭력의 소비자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와 자기 역할에만 충실할 뿐, 삶의 부조리를 깨닫지 못한다. 아니 여유가 없다. 폭력적 이미지가 날마다 반복 제시되면서 우리 생의 감각은 점점 마비되고, 심지어는 그 잔인함에 매료(?)되는 기이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악의 평범성을 오래 전에 지적한 바 있다. 그녀는 독일계 유대인 사상가이자 미국 정치 철학자이다. 악의 평범성은 그녀가 출간했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 부제에 쓰인 용어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이송시켜 학살하도록 한 나치 중간 간부였다.
1961년, 그는 도피처였던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돼 예루살렘 공개재판에 서게 된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에서 피신,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아렌트는 ‘뉴요커’ 기자 자격으로 학살 실무책임자였던 아이히만 재판에 참관하게 된다.
재판에 참관했던 사람들은 아이히만이 스스로 참회하고 반성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모두가 유죄인데, 왜 나만 유죄라고 하는가’라고 오히려 반문했다고 한다. 이에 경악한 아렌트는 1965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를 출간해 ‘악은 악인이 행한다’는 기존통념에 전적으로 반하는 주장을 펼치게 된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국가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책임감 있는 공무원이었고, 아주 근면하고 성실한 가장이었으며, 칸트의 도덕철학을 읽을 정도로 계몽된 지식인이었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재판 내내 칸트의 도덕철학을 들먹이며 “명령받은 대로, 의무에 따라 행동했을 뿐, 비열한 동기나 악행이라는 의식이 없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아이히만의 주장은 칸트철학을 왜곡한 강변에 불과했다. 아렌트도 지적하듯이 칸트는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라 인간의 자율적인 판단 능력을 강조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인간 본성은 ‘선에의 소질’로 구성돼 있다. ‘소질’은 크게 ‘자기애’와 ‘도덕법칙에의 존중’으로 구성되며, 양자는 모두 인간 행위의 근원적이고 필연적인 동기로서 자기실현과 관련된다. 인간성 실현 가능성을 규정하는 소질은 두 가지 동기를 함축한 인간 본성의 보편적 구조이다. 소질 그 자체에 대한 선택권이나 결정권은 없지만, 행위의 두 동기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의 결정은 전적으로 행위자의 자유로운 선택의지에 달려 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자신의 의지, 즉 자율적 판단 능력이 없는 ‘무사유’한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는 마치 ‘매사에 성실하고 정직해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던’ 김남주 시의 ‘어떤 관료’처럼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자였다. 아렌트는 히틀러가 ‘실체적 악’이라면, 히틀러 신념을 아무런 사유나 비판 없이 추종한 아이히만은 ‘평범성의 악’을 대표하며, 나아가 비판적 분석 능력을 잃어버린 대중은 누구나 이런 ‘악의 전령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대다수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저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인식, 주어진 일이나 묵묵히 수행하면서, 나는 악의 전령사가 아니라고 누가 반박할 수 있겠는가. 나 이외의 것에는 무관심하거나 침묵하는 나와 너. 그런 우리가 많아지는 현실에서 나는 인간이 얼마나 속절없고 무능하고 몰염치하고 이기적인 존재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