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시인이 들려주는 인문학 이야기] 우리는 모두 히스테리 환..
오피니언

[시인이 들려주는 인문학 이야기] 우리는 모두 히스테리 환자?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6/10/04 09:02 수정 2016.10.04 09:02













 
↑↑ 김순아
시인
양산문인협회
ⓒ 양산시민신문 
살다 보면 이유 없이 짜증이 나거나 신경질이 나고, 심하면 호흡곤란과 수족마비 등의 증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왜 이런 증상이 일어날까? 우리는 왜 이유도 없이 아플까?


정신분석학 창시자 프로이트는 그 원인을 유아기 외상적 체험 때문에 발생한 ‘무의식적 욕망’과 이것이 의식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막는 ‘방어’ 사이 심리적 갈등에서 찾는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주목한다. 흔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회자되는 프로이트 핵심 개념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인데, 특히 ‘성적 욕망’에 대한 발견은 진정한 의미에서 정신분석학 출발지점을 이룬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아는 어머니 몸에 전적으로 의존해 쾌감을 얻는다. 그러나 그 쾌감은 구강기에서 항문기, 생식기에 이르기까지 빨고 배설하는 여러 적응단계를 거치며 억제된다. 어머니가 젖가슴을 떼는 순간 생존을 가능케 하는 영양뿐 아니라, 그와 함께 이뤄졌던 성적 쾌감도 사라지며, 배설 역시 통제 훈련을 받으면서 억압에 관련된 성격이 형성된다. 이러한 억압(거세)은 독립된 주체로 성장하기 위해 남아와 여아가 모두 경험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인데, 이것이 훗날 어른이 돼 히스테리 등 정신적 위해 상태로 남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느끼는 상처는 남녀가 서로 다르다. 성차를 인식하면서 남아는 모든 인간이 남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고, 금지(거세)가 어머니 사랑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을 벌하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사랑 경쟁자인) 아버지에 의해 행해지는 거세 공포를 초래하는데, 이때 남아는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억압하고 권위와 법을 상징하는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를 통해 성장하면 한 여성을 소유할 수 있는 (아버지의) 권위를 획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남성정체성을 획득하고 여성을 계속 욕망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남근이 없는 여아는 태어날 때부터 결핍된 존재다. 이미 ‘거세돼’ 남근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여아는 그것(남근)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부재 원인이 어머니에게 있다고 생각해 그녀를 비난한다. 하지만 어머니도 ‘거세’돼 있음을 발견하고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선다. 아버지가 남근 대신 아이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아버지를 욕망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아 접근을 금지하기 때문에 그 소망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여아는 아이라는 대체된 대상을 통해 ‘남근’을 획득할 수 있는 어머니가 될 때까지 오이디푸스 궤적을 수행할 수 없는 결핍된 타자로 사회 속에 남게 된다.


프로이트 논의는 ‘남근’ 유무를 통해 여성의 성을 ‘없는 것’으로 파악하게 함으로써 남녀 ‘차이’를 ‘차별’화해왔다는 점에서 차후 많은 이론가에게서 공격을 받아왔지만, 가부장적 구조가 아직 강고한 한국사회에서 남녀의 ‘이유 없이 아픈’ 증상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프로이트 논의를 따른다면, 여자를 소유할 수 있는 남자는 타자 욕망보다 자기 욕망을 더 강조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려고 한다. 그것이 관철되지 않을 때 화를 내고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반면 여자는 타인 욕망을 더 중시한다.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하려 하고, 부모가 원하는 것에 자신을 맞추려 애쓰는 것은 타자(부모) 욕망에 맞출 때 자신이 더 사랑받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여자가 더 스트레스가 많고, 신경질을 내거나 짜증을 내는 경향이 잦은 것도 그래서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사회에서 남녀 모두는 강박증과 히스테리를 앓는 환자들인 셈이다. 프로이트 말이 맞다면, 어쩌면 이 병은 근본적 해결이 어려울지 모른다. 살아가면서 툭툭 부딪치는 사건들은 우리에게 계속 위해(危害)를 가해올 것이며, 그 충격으로 인해 심리적 보호막에 구멍이 뚫릴 때마다 우리 의식 기저에 억압돼 있는 무의식은 의식 위로 솟아오르며 증상을 호소해 올 것이므로. 그러나 그 아픔을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을, 불쾌하고, 수치스럽고, 받아들일 수 없는 내면 상처들을 분출(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안에서 곪은 피고름이 밖으로 터져 나와야 새살이 돋듯, 춤이든 노래든, 그림 그리기든, 글쓰기든, 어떤 식으로든 표현할 때 상처는 치유될 것이다.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말고, 남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쫄지 말고, 자신을 귀하게 생각할 것, 여기서부터 건강하고 참된 자기 삶이 시작될 것이다.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