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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들려주는 인문학 이야기]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
오피니언

[시인이 들려주는 인문학 이야기]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6/10/18 09:09 수정 2016.10.18 09:09













 
↑↑ 김순아
시인
양산문인협회
ⓒ 양산시민신문 
세상 어떤 무엇도 ‘순수하게 독창적인 것’은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전 것에서 영향을 받고, 이를 계승하거나 비판적으로 수용하기 마련이다.


‘정신분석학’도 예외는 아니다. 프로이트 뒤를 이은 정신분석학자 라캉 역시 다른 철학을 수용함으로써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그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철학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핵심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다. 시니피앙(기표)은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로써 의미를 전달하는 외적 형식(기호)을 말하며, 시니피에(기의)는 소리로 표시되는 말의 ‘의미’를 뜻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꽃을 말할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형상)가 기표이고, 그 꽃에 내재된 ‘의미’가 기의가 된다.



그러나 기표는 기의를 다 담아낼 수 없다. 우리가 꽃을 말할 때 머릿속에 떠올린 꽃의 의미는 각자 다양하듯, 기표(기호)는 기의(의미)와 100% 동일하지 않다. 그래서 라캉은 기표는 기의에 가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언어체계를 라캉은 정신분석학에 도입한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구조(원초아-자아-초자아)’처럼 언어도 구조화돼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상상계(거울단계), 상징계, 실재계로 나눠 설명한다. 상상계는 프로이트의 원초아, 즉 아이와 어머니가 하나로 단계를 말한다. 이 단계에서 아이는 자신을 엄마와 동일한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가 상상한 오인(誤認)의 산물일 뿐 실재가 아니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접어드는 단계(거울단계)에서 아이는 혼란을 겪게 된다. 아이는 어머니가 뭔가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를 해독할 수 없다. 어머니에게 존재하는 결핍은 아직 상징적으로 이해 가능한 기표로 제시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혼란은 상징계에 진입해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상징계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사회제도, 법, 언어체계 세계를 말한다. 이 단계에서 아이는 아버지 이름에 의해 도입된 특권적 기표(언어)를 인식하고,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 ‘남근’이라는 상징적 해석을 얻게 된다. 이를 통해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벗어나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이를 통해 상징질서(사회적 용인, 다른 사람, 사회질서)의 주체가 되려고 한다.


이때 욕망이 생긴다. 본래 욕망이 아니라, 타인 욕망에 자신을 맞추려는, 곧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초적 욕망(무의식)은 바닷속 빙산처럼 의식 아래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실재(계)’에 문제가 생길 때, 의식 위로 솟아오르며 꿈이나 증상 등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그 표현방식은 언어 법칙(환유, 은유 등)을 따르는데, 라캉은 이 언어(말) 법칙을 분석함으로써 무의식을 읽어낼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타자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이다. 라캉 말처럼 우리는 사회적 자아로 성장하면서 점차 아버지로 대표되는 상징체계 안으로 들어와 있다. 어머니 세계로 돌아갈 수 없고, 상징체계를 벗어날 수도 없기에, 상징질서(법, 제도, 사회질서)가 욕망하는 것을 계속 욕망한다.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모른다. 공부를, 일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정말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인지, 주변 사람이 나에게 기대해서 하는 것인지 구분을 못 한다. 때문에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 남의 눈치를 살피고, 남과 다른 자신을 발견하면 불안해진다. 혹시 내가 뒤처진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그래서 남을 흉내 내려 하거나, 남에게 의존하려 한다. 어릴 때는 부모에게, 자라서는 선생, 혹은 어떤 멘토에게 자신의 문 제를 상담하고 이를 토대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멘토가 될 수는 없다. 따지고 보면, 부모도 선생도 멘토도 자기 욕망을 잘 알지 못한다. 멘토는 조금 도움을 줄 수 있을 뿐, 그의 생각을 내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그는 그의 삶을 살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문제가 있으면 내 욕망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나에게 기대하는 주변 사람이 없는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할 것인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스스로 질문해 봐야 한다. 그리고 선택해야 한다. 그 결과도 내가 책임져야 한다. 차근차근 부모나 주변 기대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 때, 나는 내 삶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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