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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들려주는 인문학 이야기] 가부장적 사유와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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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들려주는 인문학 이야기] 가부장적 사유와 여성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6/11/01 09:04 수정 2016.11.01 09:04













 
↑↑ 김순아
시인
양산문인협회
ⓒ 양산시민신문 
여성주의(feminism)는 우리 사회에서 오직 여성만을 위한다는 오해로 인해 그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나 여성주의는 결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여성주의 시초는 여권 신장 차원에서 전개해 왔다.



그러나 90년대에 이르러 페미니즘은 새로운 방향으로 물꼬를 텄다. 이 시기 젊은 여성들은 어머니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페미니즘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체성과 여성의 일상 경험을 통해 역량을 강화하고 새로운 연대를 찾아갈 것을 제안했다. 크리스테바, 식수, 이리가레이 등 프랑스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은 그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프로이트의 ‘남근 발견’이나 라캉의 ‘거울단계’에서 간과된 여성의 몸(자궁)이다. 프로이트와 라캉에 따르면 자궁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남근’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성은 오로지 남성뿐이며, 여성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는’ 혹은 ‘결핍’의 대상이자 남성을 뒷받침해야 하는 존재이다.


이 논리는 유교적 가부장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유교도 오이디푸스 구조와 유사하게 여성을 생산(모성)적 존재로만 사회질서 안에 받아들이고 여성을 배제하는 권력구조를 갖는다. 단군신화에서 ‘곰/호랑이’는 양성성을 가진 상상계에서 호랑이를 추방하고 ‘곰-여인’으로 규정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유교질서 안에서도 아이는 사회적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어머니로부터 분리를 겪어야 하고(남존여비, 군사부일체의 철저한 남성중심적 절대성을 교육받음) 어머니 지침보다는 아버지 법 앞에 복종해야 한다.


거세위협이란 ‘남성을 잃느냐, 마느냐’하는 것이지만, 유교에서는 ‘인간이 되느냐 못되느냐(‘막돼먹은 놈’이란 호래자식, 후레자식이라는 말이 ‘홀의 자식’, 즉 아버지 없이 홀어미가 키운 자식임을 상기할 것)’하는 문제기 때문에 더욱더 강력한 위협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에서 ‘아들=상속자’는 가문 계승자이며, 여아는 삼종지도(三從之道)라든가 칠거지악(七去之惡) 등을 통해 이미 거세돼 있는 존재와 같다. 즉 딸은 처음부터 거세된 존재로서(‘딸이 있으면 뭘 하나, 자식이 있어야지’와 같은 말) 영원한 이방인, 타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남성 시선일 뿐, 여성은 결코 ‘없는 것’, ‘결핍’ 대상이 아니다. 여성이 월경을 하고,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자궁이 있기 때문이다. 자궁은 여성 고유성을 상징하는 것이자, 남성과는 다른 ‘차이’, 즉 (임신을 통한)복수적 정체성을 설명하는 근거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신체적 가변성과 관련해 언제나 변화를 상정한다. 임신한 여성 몸이 시간 흐름에 따라 배가 부풀어 오르며, 출산 이후에 다시 쪼그라드는 것처럼. 그리고 여성 몸속에 있던 타자(자식)는 여성의 또 다른 정체성으로서 출산을 통해 무한으로 증식한다. 그러니까 여성 몸(자궁)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함, 그리고 변화와 새로움을 추구하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에 이르러 페미니즘은 90년대 한계를 지적하며 또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90년대 여성주의는 여성이라는 집단적 성정체성을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남성성을 오히려 소외시키거나 여성 간 다양한 ‘차이’를 표현할 수 없게 된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미국 출신 페미니스트 주디스 버틀러는 ‘여성 없는 페미니즘’을 주장하며 남녀 모두를 고려한 젠더 관점의 여성성을 강조한다. 그녀는 ‘나와는 전적으로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타자를 마주하고 그들과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불투명성’으로 설명하면서 자아와 타자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돼 있음을 강조한다.


버틀러 말처럼 우리는 누구도 타인에 대해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누구 앞에서도 자신 입장만을 강조하지 않을 것이며, 삶은 ‘관계’ 속에서 아름답게 꽃 필 것이다. 혹자는 남성이 점점 여성화돼 간다고 걱정하지만, 남성들은 더 많이, 적극적으로 여성스러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지난 역사 속에서 남성성은 우리 모두를 얼마나 힘들게 해왔던가. 경쟁과 정복과 힘의 숭배로부터 벗어나 개별자로서 각각 새롭게 변해가는 너와 나, 우리가 ‘함께’ 행복하게 공존하는 세계가 속히 도래했으면 좋겠다. 경쟁이 아니라 연대를, 힘에 의한 배타적 지배가 아니라, 공존과 배려를 실천하는 세계가 날마다 넓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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