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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들려주는 인문학 이야기] 규율 사회와 훈육되는 아이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6/11/15 10:24 수정 2016.11.15 10:24

부모에게 가장 큰 걱정은 ‘자녀교육’일 것이다. 자녀교육은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부모도 벗어날 수 없는 모두의 관심사이자 인생 최대 과제다. 그러나 그 과제를 풀어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자녀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적절한 해법을 찾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 교육 방법을 외부에서 찾는다. 


다른 사람은 자식을 어떻게 가르치고 길러내는지, 그 성공사례를 외부에서 찾고, 자녀들이 그 기준에 맞춰 살아가도록 강요한다. 말하자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좋은 직장을 얻고, 좋은 직장을 얻어야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생각은 부모 자신 생각이 아니라, 외부 기준, 즉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형성된 생각(관념, 觀念)일 공산이 크다. 


허나 그것이 진정 자녀를 위한 일일까. 사회적 기준에 자신을 맞출 때 인간은 자기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없다. 사회적 기준, 통념은 인간을 억압하는 권력으로 작동한다. 프랑스 철학자 미셀푸코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해 ‘지식은 곧 권력’이라는 명제를 제시하고, 사회적 인식을 결정짓는 각 시대 권력은 무엇이며, 그 개념이 어떻게 발생했고 변화했는지, 왜 변화했는지 따지면서 ‘지식=권력’ 위계를 해체하고자 했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우리가 학습해 알고 있는 진리, 혹은 지식에는 권력 이데올로기가 깃들어 있으며, 그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점점 노예화시킨다. 가령, 아이는 태어날 당시에는 아는 것이 없다. 엄마가 어떤 사물을 가리키며 그 이름을 명명할 때, 아이는 엄마가 일러준 대로 사물을 받아들인다. 학교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처음 학교에 간 아이들은 학교 규칙을 모르고, 지식에 대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학습을 통해 등ㆍ하교시간을 지키고, 교복을 입고 수업시간에 바른 자세로 앉아 있게 된다. 

지식정보 또한 학습을 통해 받아들인다. 현장체험을 가려할 때, 선생님이 아이들 의사를 묻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 선생님들이 장소를 정하고 학생들에게는 통보한다. 아이들은 그것을 규칙으로 받아들인다. 이때 학교는 아이들을 지배하는 권력이 되며, 아이들은 그 권력에 지배당하는 피지배자가 된다.


이러한 규율 제도는 학교뿐 아니라, 병원, 군대, 감옥 등에서 인간행위를 관찰, 통제하는 장치로 사용돼 왔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벤담 ‘파놉티콘’ 개념을 따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감시ㆍ통제하는가를 설명한다. 


파놉티콘은 바깥쪽으로는 원주를 따라 죄수를 가두는 방이 있고 중앙에는 죄수를 감시하기 위한 원형공간이 있는 감옥을 말한다. 죄수 방은 항상 밝게, 중앙 감시공간은 어둡게 유지된다. 때문에 간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죄수를 감시할 수 있고, 죄수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간수 시선 때문에 규율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한 사람의 권력자가 만인을 통제ㆍ감시하는 사회를 푸코는 ‘규율사회’라고 한다.


푸코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모두 원형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와 같다. 사회 기준, 규율에 따라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 생각하며, 그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보편적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심각하다. 이 시대 기준은 ‘자본’이다. 자본 규칙은 우리가 지켜야할 기본규칙이고 삶의 기준으로 인식되기에, 우리는 자본을 위해 평생을 죄수처럼 살아간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키는 것도 다 자본을 위해서다. 학생들이 공부를 하려는 것은 학문을 탐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회기준을 내면화한)부모 요구에 부응해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며, 취업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펙을 따기 위해서다.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아프다. 자본주의의 오랜 훈육 속에서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학생들이 많다. 

자본주의는 인간 본성과 상관없다. 교육이고 학습이고 훈육된 것이다. 자본에 훈육된 학생들에게 선택 여지는 없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물질 성공이 곧 행복으로 이어지는지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녀 교육에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나 자신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 속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자녀에게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자신만의 기준을 가질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자녀 교육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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