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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열린 칼럼] 역사 인물 토크 콘서트-서병희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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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칼럼] 역사 인물 토크 콘서트-서병희 의병장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6/11/15 10:33 수정 2016.11.15 10:33













 
↑↑ 전대식
양산시 문화관광해설사
ⓒ 양산시민신문 
양산시립박물관에서는 매월 마지막 토요일 ‘역사 인물 토크 콘서트’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1시간 정도 작은 음악회와 이에 앞서 10분 정도 양산 역사 인물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지난달 역사 인물은 서병희 의병장이었는데 과분하게도 내가 진행을 맡게 돼 자료도 찾아보고 현장답사도 하는 등 좋은 공부가 됐다.

서 의병장은 양산 위인으로는 드문 한말(韓末) 인물이다. 1867년 상북 좌삼 출생, 20세에 서울로 유학해 한의학 공부, 35세에 향리에서 한의원 개업, 그러나 시절은 그를 평범한 시골 한의사로 버려두지 않았다. 3년 후인 1905년 을사늑약,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 강제 퇴위, 정미7조약, 군대 해산…. 

그런데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전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의병이 일어났는데 서병희 선생도 분연히 일어나 임진강ㆍ한탄강 쪽에서 활약하던 의병장 허위 휘하에 들어간다. 이때 의병을 정미(丁未)의병이라고 하는데 해산당한 대한제국 군인이 무기를 가지고 의병에 합세해 이전 의병에 비해 화력이나 전술이 월등히 높아졌다. 
 
1908년 1월 이인영 총대장이 지휘하는 전국의병연합부대인 13도창의군은 군사장 허위를 선봉으로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한다. 서병희 선생은 이 부대 선봉에서 싸웠지만 일본군 선제공격으로 부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아쉽게도 당시 일본군경이 가장 두려워하던 태백산호랑이 신돌석, 후에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영웅이 되는 홍범도 의병장 등은 평민이라는 이유로 이 작전에서 배제됐다. 

더욱이 작전 중에 이인영 총대장이 부친상을 당해 고향인 문경으로 내려가면서 의병운동 중지 통문을 발함으로서 창의군 각 부대는 자신들 활동 근거지로 돌아가야 했다. 

지금 잣대로 그때를 재단할 수는 없겠지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철저한 유학자 이인영의 사상적 한계는 바로 유생 의병운동의 사상적 한계이기도 했다. 

서병희 선생은 해산한 대한제국 군인 51명을 인솔해 내려와서 경주 윤정의 의병부대와 합세해 울산과 경주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 교전해 피해를 입혔다. 5월 향리 양산에서 독자적으로 하서면(지금 원동면)과 하북면 일군 수비대와 교전하고, 당시 하북면 소재지 성천에서는 일본 상인 2명 등을 사살하기도 했다. 8월 산청 박동의 의병부대에서 일군 수비대와 교전, 큰 전과를 올렸다. 이듬해 1909년 2월 다시 독립, 50여명의 소규모 유격전 전투조직으로 편제해 게릴라전을 펼치며 체포에 혈안이 된 일본군경을 따돌리면서 종횡무진 활약했다.

서 의병장은 체포될 때까지 2년간 경주, 양산, 산청, 합천, 함안, 창원, 고성, 진주, 의령 등 경남 전역에서 14차례에 걸쳐 일본 수비대와 교전하고 적을 사살하고 교란시키고 군자금을 모집했다. 함안에서는 일군 수비대장과 경찰서장에게 격문을 보내기도 했다.

서 의병장은 체포 손길이 점점 다가오자 창원 내서면 사율리에서 은거할 계획을 하던 중 밀고로 일경에 체포됐다. 이후 의령수비대에서 취조를 받던 중 고문으로 순국했다. 향년 43세. ‘밀고’는 가까운 사람, 아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또한 안타까운 부분이다. 
 
일경이 작성한 서 의병장 체포보고서에는 그의 부하 인원와 성명에 대해 이렇게 기술돼 있다. 

“그 주소 잠복지 등은 모른다고 하였으며 엄하게 심문하여도 오직 죽음을 기다릴 뿐이라고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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