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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아 시인 양산문인협회 | ||
ⓒ 양산시민신문 |
그것은 국가의 기원을 ‘사회계약설’로 풀어낸 루소의 논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루소는 개인 기본권 수호를 위해 다수 동의에 기초한 정치 질서가 형성돼야 함을 강조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수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국가권력에 복종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고 보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람들이 자신 주권을 모두 국가에 이양하겠다고 약속을 했다는 것인데, 과연 그러한가? 우리는 단 한 번도 이런 계약을 한 적이 없다. 우리는 어느 나라에서 살아가겠다고, 그 나라 법과 체제에 따르겠다고 약속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렇게 계약을 했다고 치자는데 모두 동의하고 따른다. 그리고 그것을 매번 선거 때마다 실현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우리가 삶의 주인으로서 민주를 실현하려면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권력자는 그 권력을 지배계급에 이양하며 우리 삶을 계속해 구분해왔으며, 그 속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남자와 여자, 흑인과 백인, 젊은층과 노년층은 뚜렷이 (계)층화된다. 이것은 서로 다른 ‘차이’를 ‘차별’화해 계급ㆍ서열화하고 이제는 하나의 지층처럼 굳어져 있다. 우리가 민주를 회복하려면 이 구분체계를 부숴버려야 한다. 그러나 가능할까. 모든 질서를 파괴할 경우 혼란이 가중되지는 않을까.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질 들뢰즈는 그 가능성을 ‘천개의 고원’에서 타진하고 있다. 그는 모든 존재를 이항대립으로 분리하고, 그것을 고착화시키는 선들을 분절선 혹은 절편선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그 선을 이루는 질서 혹은 규칙(법)을 코드화라고 하며, 이 코드화가 영토화와 맞물려 만들어지는 전체를 ‘배치’라 한다. 그는 이 배치를 단선이 아니라 점선으로 구성해야 한다고 본다. 점선을 통해 서로 위치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상태를 들뢰즈는 ‘리좀(rhizome)’과 연관해 말한다. 리좀은 수목(樹木)체계의 나무뿌리와 달리 땅 속으로도 옆으로도 자라는 뿌리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뿌리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 삶의 존재방식, 탈중심적 사유방식을 의미한다.
그가 운운하는 탈중심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권력=중심’에서 벗어남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중심’이 없음(無)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타자)들은 저마다 주체이며, 이 주체들이 본래 자유를 회복하고, 서로 공감하고 연대를 형성하는 세계가 바로 탈중심 세계인 것이다. 실제 우리 삶의 장(Field 혹은 영토)은 칼로 자르듯 구분ㆍ구획돼 있지 않으며, 누구도 어느 하나도 동일하지 않다. 모든 사물과 사물, 인간과 자연은 서로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자유롭게 존재하고 생멸한다.
자연(自然) 질서를 한번 보라. 자연 질서를 따르는 존재는 어느 한 순간도 고정되거나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단단하게 굳은 지층도 때로는 습곡을 통해 서로 뒤섞일 수 있으며, 화석화된 바위도 비바람, 햇볕에 깎이거나 빛깔이 바뀌면서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 사유도 삶도 달라져야 한다. 하나의 중심을 향해서가 아니라, 어떤 중심의 성립도 불가능하게 만들면서 계속해 이탈하고 발산하는 방향으로. 정치도 마찬가지고, 그에 영향을 받는 우리 삶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바라는 탈중심, 탈층화 세계는 정치권력을 파괴하거나 장악하는 차원으로는 결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 자발성, 능동적 실천을 담지한 일상 혁명을 동반하지 않고 정치판 주인이 백번 바뀌어본들 무엇하겠는가. 변화와 혁명 의미를 이해할 의지나 능력 없는 정치, 그런 정치인은 백성을 구원한 적 없다. 그러자면 우선 나부터 바껴야 한다. 변화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 주체로 나아가야 한다. 머리(이성)가 아닌 몸(행위)으로, 삶을 치열하게 갱신해가야 한다. 스스로 변화 주인으로 나아가려는 자에게, 주인 힘을 가진 자에게 누구나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 개인들이 뜻을 함께하고 연대할 때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