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네팔ㆍ히말라야 배낭여행] 도전하는데, 너무 늦은 나이..
기획/특집

[네팔ㆍ히말라야 배낭여행] 도전하는데,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6/12/06 10:02 수정 2016.12.06 10:02

도전할수록 꿈은 이뤄지고 걸을수록 외롭지 않다.


히말라야 배낭여행은 쉽지 않다. 하지만 네팔 히말라야를 찾아온 모든 여행자들에게 부처님처럼 대하는 네팔사람들을 보면 믿음이 간다. 어렵다는 느낌보다는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긴다. 물론 비용도, 시간도, 체력도 모두 필요하다.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다.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 달렸다는 얘기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 도전해보자. 나이는 숫자에 불가하다. 도전은 자신을 넘어서게 만든다. 배낭여행은 위험이나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성숙과 치유에 더 많은 초점을 두고 있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는 ‘변신 이야기’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별과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신체적 특징을 지녔다고 설파했다. 히말라야 배낭여행은 왜 인간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 봐야 하는 지에 대한 답을 알려준다. 히말라야 배낭여행은 힐링의 시간이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그리 편안할 수 없다. 21그램의 영혼이 맑아지는 히말라야로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순례 같은 힐링 여행을 떠나보자. 나이가 많아, 여자라서, 체력이 달려서…. 그런 말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떠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이미 히말라야 언저리에 도착한 것이나 다름없다.















ⓒ 양산시민신문



대부분 네팔사람들은 하루에 두 끼 정도 먹는다. 첫 번째 식사는 오전 8시에서 10시 사이고, 두 번째 식사는 저녁 6시에서 8시 사이다. 그 사이에는 간식시간이 있다. 네팔사람들은 손으로 주식인 달밧(Dalbat)을 먹는다. 접시에는 쌀밥인 밧과 야채 카레인 타카리(tarkaari) 그리고 렌즈콩으로 만든 수프 달(dal)을 밥 위에 얹거나 따로 담아먹는다. 현지음식에 적응이 어렵다고 생각하면 튜브고추장을 준비하라고 일러주고 싶다. 달밧에 고추장을 비벼먹으면 바로 한식이 된다.


밥 양이 많다고 생각하면 식사하기 전에 미리 덜어 내야 한다. 입을 댄 음식은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한다. 음식을 남기는 것은 맛이 없다는 의사 표시므로 주의해야 한다. 배가 부른데도 주인이 음식을 더 주려고 하면 오른손을 접시 위에 포개고 ‘충분히 먹었습니다’라는 뜻의 “푸기요(pugiyo)”라고 대답하면 된다. 긴 여정의 배낭여행을 하면서 먹는 것 또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산악지대 사람들 음식문화도 배낭여행 도중 직접 체험해 볼만한 색다른 경험이다.


히말라야에 주소를 둔 강가바두

나에겐 죽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인연이 하나 있다.


지난 2006년 에베레스트 원정 등반 때 나는 ‘죽음’과 마주하는 큰 사건을 겪어야 했다. 랭보 시 구절처럼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마는 당시 홀로 남겨진 내게 그 사건은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다. 세계 최고봉을 오르겠다고 덤벼들었다가 정상(8,848m)을 88m 앞두고 일이 벌어졌다. 남봉(8,760m)에서 산소가 바닥났다. 이미 셰르파도 도망간 상황에서 홀로 남겨진 나는 체력, 정신력 모두 고갈된 채 살아남겠다는 불굴의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영하 38℃의 추위와 히말라야 특유의 회오리성 강풍 앞에 순도 99%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데드존(Dead Zone)에서 고정로프를 잡고 하산하던 중 미끄러져 얼음절벽으로 떨어졌다. 순간 한사람이 떠올랐다. 홀어머니였다. 장남인 내가 히말라야를 갈 때마다 “얘야, 너는 나보다 먼저 저승가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막상 어머니보다 먼저 가게 됐다고 하직인사를 하려니 울음이 터졌다. 엉엉 울었다. 죽음의 지대에서 의식이 점점 멀어지고 몸뚱이는 냉동이 돼 갔다. 발코니라 부르는 눈봉우리(8천500m)에서 일어설 수도 없고 걸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기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이 들자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짐승처럼 구르고 기다가 거짓말처럼 사우스콜(8천m)에 있던 셰르파들에게 목격돼 기사회생하게 됐다. 정말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곳에서 기적적으로 생환을 한 것이다.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라 사우스콜(8천m)에서 캠프2(6천500m)까지 정상적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부축을 받아 9시간 만에 힘들게 내려왔다. 그때 전진캠프에 있던 히말라야 키친보이(그릇 닦는 사람) 마일라(둘째 아들)인 강가바두를 만나게 됐다.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인연, 가장 인간적인 도움을 받으며 죽음의 문턱에서 사람 사는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온다.


마일라(이름은 강가바두지만 둘째 아들을 뜻하는 마일라를 호칭처럼 사용한다)는 마나슬루 가는 쪽에 다딩(Dading)이란 자그마한 시골동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살기가 힘들어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쿰부 골짜기 굼중(3,800m)까지 올라가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굼중에서 각종 허드렛일과 무거운 짐을 나르는 고된 일을 하다 남의 집 식모로 일하고 있던 지금 아내 비알라를 만났다. 셰르파(동쪽사람들) 부족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굼중에서 재산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며 일가친척도 없는 가난한 타망족 두 사람이 인연을 맺게 됐지만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처참하고 힘들었을까? 굳이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그런 마일라를 히말라야에서 내가 처음 만난 것은 2001년 초모랑마(에베레스트 티벳지역) 원정등반 때다. 당시 마일라는 키친보이였다. 키친보이는 원정대가 밥을 먹고 나면 설거지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하루 종일 얼음을 깨다가 캠프 사람들이 사용할 물을 만드는 일도 키친보이가 감당해야 한다. 베이스캠프에서 쉴 틈 없이 일해야 하는 고된 직업인 셈이다. 그런 그를 2002년 로체(8천516m) 원정 때도 만났고, 2004년 아마다블람(6천856m) 동계원정 때도 만나게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키친보이였다. 한마디로 원정대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2006년 에베레스트 원정 때 현지여행사에게 간곡히 부탁해 고소쿡이라는 거창한 지위를 얻게 해줬다.


바로 그때 죽음의 지대에서 사경을 헤매다 빠져나와 살아 돌아온 나와 캠프2(6천500m)에서 그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인연이 시작됐다. 사우스콜(8천m)에서 만신창이가 돼 캠프에 내려오니 유독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마일라였다. 그는 환자 수준인 나를 누구보다도 극진히 보살펴줬다. 먹지도 못하는 나에게 죽을 끓여 기운을 차리라고 떠 먹여주기도 했다. 텐트도 수시로 점검해주고 잠자리도 보살펴줬다. 내려갈 힘이 없어 보이자 내 등산장비까지 챙겨 떠나는 순간까지 보디가드 역할까지 해줬다. 고산에서 생(生)과 사(死)를 함께 한 것이다. 그래서 난 마일라를 살아있는 동안 잊을 수가 없다.


요즘 우리나라는 감탄고토(甘呑苦吐), 즉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세상사는 게 어떻게 이 지경이 됐을까?”라는 슬픈 생각마저 들 때가 많다. 동방예의지국이 맞는 지 의심이 갈 정도다.


네팔사람들은 네팔을 찾아온 외국 트레커들을 마치 부처님처럼 대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마음씨가 너무 착하다. 가난해도 도적질할 줄 모르고 물건이 탐나도 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히말라야라는 대자연이 그렇게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 싶다.















ⓒ 양산시민신문



마일라는 그 후에도 원정이나 트레킹 때마다 계속 함께 했다. 그를 고용하려면 200달러라는 돈을 더 지불해야 한다. 굼중에서 카트만두까지 내려오는 교통비를 내가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를 도와준 사람인데 돈 200불이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항상 그 친구가 그립고 만나면 마음이 편안하다.


올해 4월 26일 강도 7.9의 네팔 대지진이 터졌다. 바로 아시안트레킹에 전화를 걸어 마일라의 생사 여부를 물었다. 그랬더니 마일라는 괜찮은데 그의 집이 허물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편으론 마음이 아팠지만 사람이 다치지 않았다니 다행이었다.


지진 발생 5개월 후 나는 히말라야에서 나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려고 네팔로 향했다. 공항수속에서 짐 보따리가 무겁다고 오버차지를 물렸다. 지진 피해를 도우러 간다고 해도 항공사 규정만 들먹였다. 답답했다. 실랑이 끝에 오버차지를 물고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카트만두에서 네팔산악연맹(NMA) 회장인 앙체린과 잠시 조우하고 마일라가 살고 있는 굼중으로 향했다. 굼중의 마일라 집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히무룽 원정 때 사다였던 삼두도 만나고, 2006년 에베레스트 원정 때 사다였던 낭가도르지도 만났다. 그리고 마일라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다. 낭가도르지는 나보고 “미스터 리, 그때 현지인 하나 고용 잘못해서 고통이 심했다”고 하면서 당시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해 줬다. 난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왜냐하면 굳이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일라는 나를 보고 존경의 마음을 담아 ‘바르샤바’라 부른다. 그리고 신에게 바치는 성스러운 꽃인 띠하르꽃(Tihar Flower)으로 만든 목걸이도 선물해준다. 띠하르꽃은 우리말로 금송화(金松花)다. 마음이 따뜻한 마일라는 항상 나를 챙겨준다. 마일라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물론 지금 이 순간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까지 세밀하게 챙겨주는 세상에 보기 드문 참 인정스런 사람이다.


마일라는 지금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살아있는 동안 1년에 한번 이상은 마일라를 만나 도와주기 위해 히말라야를 다녀와야 하는 의무감까지 생겼다. 히말라야는 내게 소중한 인연과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내 인생의 진정한 스승이다.



----------------------------------



이상배
알피니스트
(사)영남등산문화센터 이사장
체육훈장 기린장 수상
세계5대륙 최고봉 등정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