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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아 시인 양산문인협회 | ||
ⓒ 양산시민신문 |
노장철학을 관통하는 도(道) 역시 자연을 깊이 들여다보는 데서 출발했다. 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도교) 개념이 아니다. 도는 인간 시선(觀)에 의해 차별되고 부분화되고 왜곡되기 이전 존재 본성과 관련된다. 서양철학에서 존재는 ‘인간(유일자=신=logos)’을 중심으로 파악하지만, 노장의 도(道)는 인간 중심의 나(I)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노자 ‘도덕경’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노자는 도가 두 대립 면 ‘관계’로 이뤄져 있다고 본다. 유무상생(有無相生), 유물혼성(有物混成)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존재를 상호 ‘관계’성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노자는 유무(有無) 두 대립 면은 새끼줄처럼 서로 꼬여 끊임없이 이어지며, 그것은 ‘텅 비어(無․虛)’있기에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만일 억지로 이름 붙인다면, 큰 것(大)이라 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을 도(道)라고 말한다. 이러한 도의 특징은 이데아적 관념으로 존재 의미를 규정하고 고정시키는 서양철학 존재개념과는 상반된다.
유와 무과 처음부터 뒤섞여 끊임없이 이어지는 도는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고, 어느 한 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고정돼 있지 않는다. 그래서 노자는 ‘도덕경’ 첫머리에서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고 말한다.
노자는 이러한 도를 자연에서 찾고 있다. ‘자연(自然)’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실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그냥 있으면서도 움직이는 존재 혹은 행위의 어떤 양상을 묘사하는 말로서, 자신 존재와 행위를 스스로 결정할 뿐, 그 밖 다른 외적 규칙을 따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스스로 결정하고 행위하는 자연은 대상을 소유하려하거나 지배하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거대한 힘에 끌려가는 왜소한 인간을 포근히 감싸준다. 인간이 횡포를 부릴 때는 다소곳이 그 수모를 참아내지만, 조용히 그러나 강력한 힘으로 그에 대응한다.
무위(無爲)의 자세가 바로 그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란 결코 ‘무위도식(無爲徒食)’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위란 보통 인간들에게서 발견되는 ‘일체의 의식적 행위가 없음’, 즉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행동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동이 바로 무위의 위(爲)이다. 도 실현방식은 이러한 무위의 방식이고, 이런 무위의 길(道)이 우리가 따라야(道法自然) 할 삶의 길이라는 것이다. 노자는 그 실천자로서 가장 훌륭한 것이 ‘물(上善若水)’이라고 말한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면서 뭇 생명들 속에 깃들지만, 그 생명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는다. 마치 어머니처럼 흘러들지만 곧 스스로는 그 생명으로부터 더 낮은 곳으로 떠난다. 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솟아오르며 저절로 움직인다. 조그만 틈도 뚫고 들어갈 수 있으며, 단단한 바윗덩어리도 뚫을 수 있다. 얼음처럼 단단해지기도 하고 수증기처럼 부드러워지기도 한다. 노자는 이러한 물의 속성을 성인 통치와 연결해 물처럼 살기를 강조한다.
대개 우리는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지식을 쌓으면 시체처럼 뻣뻣하고 딱딱해진다. 성공의 기억이 우리를 딱딱하게 만든다. 그러나 진정한 주체는 반드시 저자세를 취한다. 물의 자세가 가장 훌륭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낮추기 때문이다. 노자는 우리에게 물처럼 살아서 자신을 낮추고 부드럽고 유연한 자세를 취하라고 충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