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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아 시인 양산문인협회 | ||
ⓒ 양산시민신문 |
장자의 도(道)는 세계 근본이라는 의미에 이어 최고 인식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장자에 따르면 세계 인식은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어떤 구체적인 사물도 없었다’는 인식을 전제해야 한다. 이것은 본질상 무차별성과 신비성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무차별성은 내용(觀念)이 없는 자연무차별(自然無差別), 즉 시비와 애증을 용납하지 않고 차별이나 한계가 없는 절대 조화 경지를 말하며, 신비성은 주로 헤아릴 수 없고 짐작할 수 없음을 가리킨다.
장자는 제물론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도는 일컬어지지 않고 위대한 변론은 말로하지 않는다’, ‘도가 말해지면 도가 아니고 말이 논변을 이루면 언급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夫大道不稱, 大辯不言… 道昭而不道 言辯而不及’고 역설했다. 지식을 포함, 현실의 모든 시비(是非)와 호오(好惡)를 초월한다면 무차별의 경지에 감화해 들어갈 수 있고, 정신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장자가 말하는 초월은 서양의 시공초월 의미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서양의 초시공(超時空)은 현실 초월적 관념(idea)과 연결되지만, 장자의 초월은 결코 현실을 회피하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다. 장자는 도가 현실을 껴안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회의하고 부정하는 가운데 적극 실현된다고 본다. 그의 유명한 ‘곤붕이야기’를 한번 보자.
북쪽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 이름은 ‘곤’(鯤)이다. 곤의 둘레 치수는 몇 천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 이름은 ‘붕’(鵬)이다. 붕의 등은 몇 천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붕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 때, 그 양 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다.
―「소요유(逍遙遊)」中
위 일화에 등장하는 대붕은 장자가 말하려는 소요(逍遙), 즉 정신적 자유 의미를 우회해서 들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붕이 돼 구만리장천을 자유롭게 날아가려면 우선 물고기가 ‘새’로 변하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 이때 물고기는 몸이 찢기고 살이 터지는 엄청난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 그런 고통을 겪은 후에라야 물고기는 큰 새가 돼 높은 하늘로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대개 자유를 편안함과 안락함으로 인식하지만, 자유는 결코 편안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자유는 고통을 겪는 과정, 자기 앞에 놓인 여러 가지 부정적인 조건들을 극복하는 과정과 함께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스스로 선택해 그 일을 실현해 나갈 때, 반드시 고통이 함께한다. 그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놀이로 받아들일 때 자유를 맛볼 수 있다.
(자유로운)소요 주체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유(有)와 무(無)가 원래 한 덩어리이듯이, 나와 너 또한 원래부터 섞여 한 덩어리로 존재하며 계속 변화하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서로를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고, 대상을 어떤 성취를 위한 목적이나 수단으로 이용하려 하지도 않는다. 장자는 그 실현방법으로 좌망(坐忘)과 심재(心齋)를 제시한다. 좌망은 신체와 정신을 모두 잊고 도와 합일하는 것을 말하며, 심재는 정신적으로 편안하고 허정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아직 타자에 대한 의식이 없는, 비인칭적인 마음(=虛心)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타자와 만남을 위한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가 남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나와 그에 대한 관념(편견)을 버려야 가능하듯이, 본래 -무차별적-무(無)의 상태를 회복해야만 자신 및 세계,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이쪽저쪽을 모두 볼 때에야 피차 상대성을 볼 수 있게 되고 비로소 전체적인 인식을 할 수 있다고 한다.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서 진정 자유를 얻고자한다면 이러한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