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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대식 양산시 문화관광해설사 | ||
ⓒ 양산시민신문 |
5년 전인 1869년, 수백년 동안 양산군에 속해있던 구포가 불의에 동래부로 탈속(奪屬)돼 버렸다. 대혼란에 빠진 양산군민들은 구포 복설을 위해 의정부와 경상감영 등 요로에 상서를 올리는 등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황당하기 그지없게도 ‘너희가 알바가 아니다’라든지, 요즘 말로 ‘잘 알아보고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하겠다’라는 식의 극히 두루뭉술한 대답뿐이었다.
그러면 양산군민들은 왜 그렇게 구포 환속에 매달렸던 것일까. 구포는 당시 양산군민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지금 양산시립박물관에서 개최 중인 개관 4주년 특별기획전 ‘1874, 한양으로 떠난 세 사람 이야기’에서는 이 때 보냈던 12건의 ‘구포복설상서(龜浦復設上書)’ 진본을 공개하고 있는 데 그 속에 답이 있다. 상서 내용 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본 고을 8개 면 가운데 구포는 땅이 넓고 가구가 실제로 한 군의 절반입니다. 또한 팔로(八路) 상선이 수시로 왕래합니다. 그리해 살림살이가 풍요롭고 재정 출입이 7개 면에 비해 백배나 됩니다. 따라서 본 고을 공사 간 비용이 구포에서 취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구포는 본 고을 목숨이 관련된 곳이라 할 만합니다. 뜻하지 않게 지난 기사년(1869)에 동래부에서 계책을 내어…(구포를) 횡탈해 동래부에 이속시켰습니다…”
문면 속에서 부(府)와 군(郡)의 분쟁, 동래부 횡포, 인(人)부족, 세(勢)부족으로 구포를 빼앗겼다는 양산군민이 사건을 바라보는 인식을 엿볼 수 있다. 현 부산광역시 북구 여러 지역들은 조선시대까지 우리 양산에 속해 있었는데, 그 중 감동창(甘同倉)이 위치한 구포지역은 조선시대 최고 물류 중심지였다. 낙동강 연안 군현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 등을 한양으로 운송하는 등 경상도 거점 물류 센터였다. 때문에 “경상도 돈은 구포에 다 모인다”라고 할 만큼 구포는 양산 경제 황금알이었다.
여러 번 상서에도 날짜만 지나갈 뿐 아무런 진전이 없자 양산 유림에서는 존경받는 세 선비를 한양에 보내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기로 한 것이다. 고생 끝에 한양에 도착은 했지만 임금은 만날 길이 없고, 노자는 다 떨어져 거지꼴이 된 세 선비는 드디어 특단의 방법으로 나라님에게 알리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남산봉수대에 올라가 봉화를 올린 것이다.
6월 25일까지 열리는 이번 특별기획전은 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구포복설상서 12점을 비롯해 관련 역사자료 100여점을 전시한다. 신용철 박물관장은 “최근 양산은 급속한 인구 증가와 편리한 교통수단 발달로 지역 공동체가 약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특별전을 통해 150여년 전 양산민이 가졌던 애향심을 이해하고 이를 계기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의식을 함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표명했다.
이에 우리 해설사들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다. 꼭 해설 예약을 해주시기를 바라며, 개인일 경우는 토ㆍ일요일 오후 2시에는 따로 예약 없이도 해설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쓸데없는 궁금증 하나, 그때 봉수대를 지키던 군사들은 사건 후 어떻게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