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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아현 기자 coffeehof@ysnews.co.kr | ||
ⓒ 양산시민신문 |
하지만 와플을 먹지 못했다. 아니 가게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말로만 들었던 ‘노키즈존’이 돼있었다. 점원이 가게 문 앞에 나와 정중히(?) 우리를 가로 막았다. “13세 미만 유아 동반은 입장이 안됩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래요? 아쉽네요”하고 쿨한 척 돌아섰다.
그날 밤늦도록 노키즈존에 대해 뒤져봤다. 결론적으로 노키즈존은 ‘아이’가 아닌 ‘무개념 부모’가 확산시켰다. 식사하는 테이블에서 기저귀를 갈고 심지어 그 기저귀를 치우지 않고 그냥 간 부모, 식당 곳곳을 뛰어 다니는 아이를 두고 반주하며 밥 먹는데만 열중하는 부모. 게다가 식당에서 아이가 뛰다 다쳤는데 식당이 4천만원 정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은 노키즈존 옹호론자를 만들어 내기에 충분해 보였다.
많은 부모가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1% 소수가 99% 부모를 욕보이고 있다고 격분한다. 그런데 진짜 1% 뿐일까? 나는 진짜 아닐까?
울어대는 갓난 아이 때문에 끝내 밥을 다 먹지 못하고 나왔던 기억, 핸드폰은 안된다고 훈육했던 내가 한 손에 뽀로로가 틀어진 핸드폰을 아이 얼굴에 들이밀면서 밥 먹은 기억, 아이 투정에 급하게 밥 먹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소화제를 사 먹은 기억.
누구나 민폐 부모가 될 수 있다. 누가 누구를 손가락질하고, 나는 결코 아니라고 고개 흔든다고 열외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키즈존 확산이 이미 유아동반 부모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면을 빌어 푸념 한 번 할까한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건 확실히 사회약자 입장을 경험하는 일이다. 노키즈존 카페 앞에서 나는 약자였다.
지친 육아 와중에 잠시 짬을 내 커피를 사 마시는 엄마를 어떤 이들은 모멸적인 이름으로 부른다. ‘맘충’. 지난해 출간한 조남주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주인공이 말했다.
사람들이 아이 키우는 부모에게 조금만 더 관용을 가져주길 바라지만, 이 역시 내가 부모 입장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한다. 나도 엄마가 처음이다. 부모이기 이전에 자유분방한 청춘이었고, 인정받은 직장인이었고, 누구에게도 간섭받기 싫어하는 차도녀였다.
한 달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그 집 와플이 생각나는 내가 서글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