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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대식 양산시 문화관광해설사 | ||
ⓒ 양산시민신문 |
어릴 때 ‘춘향전’을 볼 때마다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 작품 하이라이트는 이 도령이 변 사또 잔치판에 암행어사로 출두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이때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치며 뛰어나오는 제법 많은 수 군졸들은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했는데, 얼마 전에 궁금증이 풀렸다. 답은 이 글 끝에 공개한다.
지난 10월 27일부터 양산시립박물관에서는 ‘황산역(黃山驛)’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역이란 기차역도 아니고 지하철역도 아닌 말(馬)역을 이르는 말이다. 특별전 안내 자료에도 ‘horse station’으로 번역돼 있다. 양산박물관에서 간행한 안내 자료를 주로 참고해 황산역에 대해 좀 알아보자.
황산역과 관련한 최초 기록이 <고려사> 「병지(兵志)」에 나오는 것을 볼 때 황산역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몇 차례 변화를 거쳐 종6품 찰방을 총책임자로 해 산하에 16개 속역을 거느린 큰 역으로 발전한다. 1895년에 발간된 <황산역지>에 따르면 역리ㆍ역졸ㆍ역노 등 모두 8천814명의 인원과 대마ㆍ중마ㆍ복마 등 모두 136마리 말이 소속된 영남 최대 역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역은 주요 도로를 연결하는 통로이자 쉼터였다. 동래에서 한양을 잇던 길을 ‘영남대로’라고 했는데, 그 한 구간인 황산도에 설치된 역이 바로 황산역이다. 예나 지금이나 역이 발달하면 사람이 모이고 길이 열리고 물류가 활발해진다. 황산역이 커지면서 인근에 황산장이 형성됐는데, 현 물금장 전신인 이 장은 매 5일과 10일에 열리는 전형적인 5일장이었다.
한편 황산잔도로도 불리던 황산도는 선비들 과거길, 보부상들 장삿길, 왜상(倭商)들 상경길이기도 했다.(임란 이후 왜상들 상경은 금지됐다) 영남에서 한양까지 천리 길 여정은 곳곳에 잔도(棧道)와 벼랑길, 높은 고개가 도사리고 있는 험난하고 먼 길이었다. 공무를 수행하는 관원이 아닌 자는 역참을 이용할 수 없었지만 역에서 운영하는 원우(院宇)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는 있었다. 황산역에도 이와 같은 원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황산역 동과 서에는 대천(양산천)과 황산강(낙동강) 범람을 막는 제방이 있었으며, 제방 안쪽 부분은 모두 말을 키우기 위한 마위전(馬位田)이었다. 그러나 황산강 잦은 범람으로 황산역은 역 기능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 결국 1857년에 상북면 상삼리 일대로 역을 옮긴 후 역원제가 폐지되는 1895년까지 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역에 소속된 역마를 이용할 때에는 상서원에서 발급한 마패에 그려진 말 수에 따라 역마를 쓸 수 있었다. 흔히 암행어사가 지니고 다니는 마패가 그것이다. 마패 중에는 5마패가 최고인 줄 알고 있었는데, 7마패와 10마패도 있었음을 이번 특별전을 통해서 알았다.
역은 왕명이나 공문서 전달, 관수 물자 운송, 사신 영송과 접대, 범죄인 체포와 압송, 유사시에는 국방 임무까지 담당했다. 이제 서두에서 언급한 군졸들에 대한 답이 약간 나온 것 같다.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치며 뛰어나오는 군졸들은 바로 역에 속한 역졸들인 것이다.
양산시립박물관 ‘황산역’ 특별전은 내년 1월 21일까지 계속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이 글을 읽는 시민에게 특별전이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면 좋겠다. 또 우리 문화관광해설사와도 함께해 더욱 만족스러운 관람을 즐기기를 권한다. 토ㆍ일요일 오후 2시에는 따로 예약하지 않아도 해설을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