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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대식 양산시 문화관광해설사 |
ⓒ 양산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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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달 동안 문화체육관광부의 ‘인문활동가’라는 이름으로 부산시 북구 지역에서 활동할 기회가 있었다. 정식 사업명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2017 인문활동가 양성ㆍ파견 사업’이다.
문체부 자료를 요약하면 이 사업은 문체부 2017년도 시범사업으로 인문 분야 석ㆍ박사급 전문 인력을 ‘인문활동가’로 양성해 지역의 다양한 문화시설, 동아리 등에 파견한다.
사업 목적은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 확산에 대응해 인문 분야 전문 인력에게는 전문성과 경력을 잘 살릴 수 있도록 하고, 지역에는 주민이 스스로 참여하는 자생적인 인문 활동을 촉진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인문활동가’는 지역 특성과 본인의 전공영역 등에 맞춘 다양하고 창의적인 인문 활동을 기획ㆍ운영한다. 4개월 동안 한시적인 사업이었지만 이 활동을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느낀 바가 있어 여기서 풀어놓고자 한다.
우선 주제는 ‘소통의 인문학-황산강 이야기’로 정하고, 북구의 향토사 연구단체인 ‘낙동강연구소’ 도움으로 참가자들을 모집해 ‘낙동강하구 역사문화연구동아리’를 구성했다. 총 12회 프로그램은 초청강연, 답사, 자체발표와 토론으로 기획했다. 양산향교 구포복설비와 춘추공원 윤현진 흉상 답사, 양산시립박물관 ‘황산역’ 특별전 관람, 그리고 낙동강 생태탐방선을 이용한 황산공원 방문도 포함했다.
낙동강을 끼고 있는 물금신도시 인구가 10만명을 넘었는데 전입과 전출이 가장 많은 곳이 부산 북구다. 이 사업의 주최측에서는 북구에 한정된 활동을 주문했지만 그래도 양산의 문화관광해설사가 기획하는 프로그램인데 양산을 뺄 수 있겠는가. 아니 꼭 그게 아니라도 부산 북구, 특히 구포를 이야기할 때 그 뿌리인 양산을 빼고는 이야기가 될 수가 없다.
기록에 의하면 현재 부산 북구는 저 멀리 665년 신라 문무왕 때 삽량주가 설치된 이래 1910년까지 무려 1천250여년 동안, 그리고 ‘양산’이라는 지명이 정해진 조선 태종 이후로만 해도 500년 동안이나 우리 양산에 속해있었다. 1869년 구포지역이 동래부에 탈속된 적이 있었는데, 양산군민의 눈물겨운 복설운동으로 5년 만에 다시 양산군으로 환속됐다.
당시 구포 사람들은 ‘차라리 남창(구포)의 물을 마실지언정 동래부의 물고기를 먹지 않으며, 차라리 양산 땅에 돌아가 죽을망정 동래부에 머물지는 않겠다’라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지난해 양산시립박물관에서 개최한 ‘1874, 한양으로 떠난 세 사람 이야기’ 특별전에서 감동적으로 재현된 바 있다.
구포에는 양산의 기억이 많이 남아있다. 비석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는 ‘군수 이유하 축은제비’, ‘군수 심능섭 수덕불망비’, ‘군수 손상일 휼민선정비’, ‘군수 이계필 청덕휼민비’ 등이 있다. 구포 사람들이 근대 구포가 배출한 위대한 선각자 윤상은의 조카로 기억하는 윤현진은 근대 양산이 배출한 위대한 독립 운동가다. 원동면 용당리 가야진사처럼 구포에도 용신제를 지내던 용당마을이 있는데 데 이곳 사람들은 지금도 윗용당, 아랫용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픈 역사지만 증산왜성ㆍ호포왜성처럼 구포왜성도 있다. 조선시대 최고 물류 센터였던 감동진에서 동원진, 호포진, 물금진, 가야진 등으로 이어지는 낙동강과 함께 오랜 세월을 양산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던 곳 구포, 그 뿌리가 양산인 것이다.
이야기가 다소 길어졌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것, ‘양산과 구포는 하나!’이다. 누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나는 ‘행정구역은 선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다. 낙동강을 공유하고 있는 두 지역 향토사를 공부하고, 유적을 답사하고, 선인들 삶을 추체험(追體驗)하면서 두 지역의 이해와 유대감을 높이고 인문 활동을 촉진시키는데 조그마한 역할이나마 했다고 감히 자평한다. 다음에는 양산에서 이런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