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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수현 (재)한반도문화재연구원장 문학박사(고고학) | ||
ⓒ 양산시민신문 |
한편, 양산시의 지리적 위치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김해와 부산에 가까워 낙동강문화를 기반으로 형성된 가야문화권에 해당한다. 문헌기록을 통해 보면 양산지역과 가장 가까운 김해 금관가야는 신라 법흥왕 19년(532년)에 복속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고학에서는 이보다 약 100년 정도 빠른 5세기 전반 대에 금관가야지역이 이미 신라화됐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신라문화와 가야문화가 결점하는 양산지역은 어떠했을까? 주지하다시피 양산지역은 신라가 가야로 진출하는 주요 요충지이다. 이 견해에 대한 실마리는 최근 양산시 가야사 학술대회에서 제시한 양산 부부총 발굴조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양산 부부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발굴된 뼈아픈 고분이며, 이후 1991년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재조사를 진행했다. 당시에 밝힌 결과는 6세기 전반 대에 추가장이 이뤄진 부부합장묘의 횡구식석실묘였다. 하지만 양산시 가야사 학술대회 발표자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이주헌 소장에 의해 부부총은 횡구식석실분이 아니고, 부부합장묘보다는 순장을 시행한 고분으로 추정됐다.
신라는 지증왕(502년) 때 순장제금지를 제정했다. 순장제금지 외에도 ‘신라’ 라는 국호와 마립간에서 왕으로 왕호(지증왕 503년)를 사용했다. 하지만 순장제가 폐지된 6세기 초에도 양산지역은 여전히 순장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것은 신라 중앙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은 독자적인 가야세력이 양산지역에도 존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견해가 만약 타당하다면 양산지역도 금관가야와 마찬가지로 적어도 6세기 전반까지 신라에 복속되지 않은 독자적인 가야정치체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독자적인 가야정치체의 국명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연구성과에 의하면 양산지역 가야국명은 삽라국, 사라국 등으로 거론되고 있다.
다행히 올해 양산시에서는 지역문화유산에 대한 정책을 펼치고 있으며, 여기에 대한 종합정비계획을 시행할 예산이 책정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 생각된다. 지금 양산시는 짧은 시간 동안 주변 대도시 영향으로 급성장했고, 인구 역시 30만이 넘는 중견도시로 도약했다. 앞으로는 이러한 중견도시 면모에 맞는 지역문화와 교육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