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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형철 전 양산 하북초 교장 (사)미래인재교육연구소 대표 | ||
ⓒ 양산시민신문 |
그러나 모든 힘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말의 힘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말이 지닌 양면의 날을 잘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부드러운 말을 사용하면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만, 날카로움을 통제하지 못하면 자신을 망가뜨리기도 하고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인간의 말은 귀소본능을 갖고 있다. 사람의 입을 통해 태어난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돌고 돌아 어느새 말을 내뱉은 사람의 귀로 다시 들어간다. 말을 의미하는 한자 언(言)에는 깊은 뜻이 숨어있다. 두(二) 번 생각하고 말을 해야 비로소 말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품격이 있듯 말에도 나름의 품격이 있다. 그게 언품(言品)이다.
말은 곧 자신이며 말하는 사람의 마음의 소리다. 천하의 명장 항우가 유방에게 패한 이유가 뭘까? 혹자는 “인덕이 부족해서”라고 입을 모은다. 항우가 재주와 힘은 유방보다 뛰어났지만 우호적인 인적 네트워크가 부족해서 천하를 얻지 못한 것이다. 항우는 힘으로는 상대의 몸을 짓누를 수는 있었지만 상대의 마음속에 들어앉을 수는 없었다. 항우가 대업에 실패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덕장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몰리는 법이다. 유비는 자신의 덕으로 천하의 인재를 모았고 그들의 의견에 귀를 내어 주었다. 제갈량을 자기 사람으로 만든 과정에서는 세 번이나 찾아가 고개를 굽히며 도움을 청한 것에 유래된 삼고초려는 오늘날 겸손과 굽힘을 통한 난제 해결에 자주 등장하는 고사성어가 됐다.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은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바깥쪽이 아닌 안쪽에 있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문인화가 김유근은 “말하지 않아도 뜻을 전할 수 있으니 침묵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나 자신을 돌아보건대, 침묵하면 세상에서 화를 면할 수 있음을 알겠다”는 글을 남겼다.
<피로사회>라는 책에서는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고 한다. 21세기를 지배하는 질병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질환이다”라고 했다.
그 대표적인 조어로 회자되고 있는 말이 ‘내로남불’이다. 정치권에서는 매일 내로남불이란 조어로 서로 공방을 주고받으면서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신조어가 단어가 되려면 대중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어떠한 어휘가 많이 사용되기 위해서는 그 어휘가 사용될 만한 환경이 늘어나야 한다. 이타주의보다 이기주의가 앞서는 요즘 세상은 ‘내로남불’이 단어로 굳어지기에 너무나 완벽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타인의 허물을 꼬집어 가리키는 지적(指摘)은 자칫 독설로 변할 수 있다. 독설 중에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독도 있지만, 보통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고 독을 흩뿌린 사람의 혀마저 망치는 경우가 많다. 말 자체는 차갑더라도, 말을 전하는 순간 가슴은 따뜻해야 한다. 비평의 비(批)는 손 수(手)변에 견줄 비(比)가 합쳐진 글자다. 사물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며 총체적으로 판단하는 게 제대로 된 비판이다.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는 순간 상대를 가리키는 손가락은 검지뿐이다.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세 손가락은 ‘나’를 향해있다. 세 손가락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검지를 들어야 한다. 타인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내가 떳떳한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숙성되지 못한 말은, 오히려 침묵만 못 하다.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은 대개 말이 아닌 침묵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