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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빛과 소금]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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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8/11/13 09:47 수정 2018.11.13 09:47













 
↑↑ 박동진
소토교회 목사
ⓒ 양산시민신문 
2천년 전 여자들은 인권이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남자의 재산목록 가운데 하나였고, 매매가 가능한 존재로 생각했으며, 외부 세계와 완전히 격리됐고, 철저히 아버지나 남편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여성들은 성전의식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율법을 가르치지 않았으며, 당연히 율법교사도 될 수 없었다. 여자의 손에 토라(율법을 기록한 성경)가 들어가느니 불에 태워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결혼한 여성은 가사일 뿐 아니라 가축을 지키고, 밭에서 일하며, 양털로 실을 뽑아 옷을 짜는 일을 했다. 남편의 잠자리를 준비하며, 일하고 돌아온 남편의 얼굴과 손발을 씻겨 주는 것도 부인이 당연히 해야 할 의무였다. 딸 역시 모든 궂은일을 도맡아 했지만 남자 형제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지 못했고, 혼인하지 않은 처녀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일은 오직 외출하지 않는 것이었다. 남존여비는 당연한 사회규범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여인들을 남자와 똑같은 인간으로 봤고, 하나님이 창조한 소중한 인격체로 받아들이셨다. 수많은 여성이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만났고, 율법을 배웠으며, 제자가 됐다.



이런 예수의 여성관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자를 남자와 다름없이 대우하는 예수의 태도는 이후 교회에도 그대로 내려왔다. 교회에서는 이스라엘 회당과는 달리 여자와 남자가 한 공간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예배 시간에 여자들이 대표기도도 했고, 예언도 했으며, 설교도 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는 수많은 여자 지도자가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렇게 교회에서 여성들이 차별 없이 활동하다 보니 때때로 급진적인 여성인권운동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교회에서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은 운동이었다.



당시 여자들이 수건 같은 것으로 머리와 얼굴을 가리는 것은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이스라엘도 그랬고, 로마가 지배하는 대부분 지역이 그랬다. 여자들이 이렇게 머리와 얼굴을 가리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숨길 뿐 아니라 자신은 아버지와 남편의 지배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사회적인 풍습이었다. 그래서 교회에서라도 그 너울을 벗어버림으로 여성의 존재를 찾자는 것이었다.



‘여성이여 너울을 벗어라, 당신은 남자에게 지배당하는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어엿한 사람이다’



이러한 운동은 당시 초대교회 내에서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런데 이 좋은 취지의 운동이 뜻하지 않는 문제에 봉착했다. 두 가지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친 것이다.



첫째는 여자들 얼굴을 가린 너울을 벗어버리니 그 아름다운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돼, 남자들 음욕을 일게 한 것이다. 지금은 여자의 가린 얼굴을 본다고 무슨 음심이 생기겠냐고 피식 웃고 말 일이지만, 당시에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가수 윤복희 씨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미니스커트를 입은 모습이 TV에 방영됐을 때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며 난리가 났었던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여자들이 교회에서 얼굴을 가리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니 남자들이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게 됐고, 이로 인해 여러 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스캔들이 생겼으며, 마침내 교회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됐다.



두 번째는 여성의 인권을 찾기 위해 너울을 벗자고 했는데, 이미 너울을 벗고 있던 여성들이 있었다. 바로 창녀들이었다. 당시 창녀들은 거리에서 너울을 벗고 호객행위를 했기에, 너울을 벗은 여인은 당연히 창녀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생각해보라. 여성 인권을 세우기 위해 교회에서 너울을 벗었지만, 이걸 본 세상 사람들은 교회는 창녀소굴로 오해하게 된 것이다. 여성 인권을 세우기 위한 행동이 도리어 기독교인들을 창녀와 같은 존재로 비하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한 끝에 좋은 취지라도 방식이 오해를 낳고, 나쁜 결과를 낳는다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남녀차별의 타파와 여성인권의 문제 등은 교육을 통해 고쳐가는 것으로 방향을 달리 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14:40) 이것이 이 문제의 결론으로 내린 해법이었다.
2천년 전 교회에서 일어났던 이 사건이 이 시대 페미니즘의 반면교사가 되기를 바란다. 요즘 우리 사회도 여성인권에 관한 문제가 심심찮게 사회 이슈로 등장하고 있고, 또 많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 캠페인들이 좋은 효과를 거두며, 우리 사회가 남녀차별이 없는 건강한 사회가 되길 기도한다.



그런데 우려가 되는 것은 여성 인권을 세우기 위해 남성을 적대시하고, 남성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며, 여성들이 받았던 차별을 똑같이 돌려주는 것을 페미니즘 운동이라고 생각해, 페미니즘을 마치 성대결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의 본질이 오해받고, 페미니즘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혐오는 혐오를 낳을 뿐이다. 페미니즘은 아주 고귀한 사상이다. 그렇기에 더욱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진행해야 그 가치의 빛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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