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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이섭 문화교육연구소田 소장 |
ⓒ 양산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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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양산으로 귀향해 2008년 12월 연구소를 연 지 정확히 10년째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동안 연구소는 시골 밭에서 사계절 뿌려지고, 거둬들이는 농사처럼 조용하게, 때로는 아이들 재잘거림 속에 정중동(靜中動)의 모습으로 큰 변화 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겠지만, 애초 가지고 있던 생각의 틀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한 달에 한 번 1박 2일로 아이들과 활동ㆍ연구를 하고 있는데, 활동하기 전 항상 아이들에게 놀 때, 쉴 때, 먹을 때, 일할 때, 공부할 때 등 ‘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시작한다. ‘때’를 잘 구분 짓지 못함에서 아이들 성장에 문제가 생긴다. 이는 비단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 세계에서도 구분이 모호해 많은 문제가 생겨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시대 역행은 아닐까 고민도 한다. 스마트폰이 탄생한 지 10년 만에 인류의 새로운 기준이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 스마트폰을 신체 일부처럼 사용하는 인류)’로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내 연구소에서는 10년 동안 ‘때’를 잘 구분 짓기 위해 활동 중에는 핸드폰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연구소를 찾는 아이들 가운데 ‘노모포비아(nomophobia: 스마트폰이 없을 때 초조해하거나 불안감을 느낌)’ 증상을 보이는 아이들이 없어 다행이다.
‘기술융합,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시대에 ‘때’를 구분하며 감성(Feeling)과 경험(Experience)을 이야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퇴보적인 것일까? 문명을 바라보는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할까? 경제ㆍ공학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각종 데이터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인류의 선택에 의한 진화를 따르는 것이 맞겠지만, 나는 인간적, 교육적 측면에서 ‘포노 사피엔스’라는 기준 설정을 유보하고 싶다. 적어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더욱 이 기준 설정에 대해 ‘판단중지(判斷中止)’하고 싶다.
두 눈이 있어도 제대로 안 보이고, 두 귀가 있어도 제대로 안 들리고, 두 코가 있어도 제대로 안 맡아지고, 두 팔과 다리가 있어도 제대로 활용 못 하는 등 기계문명에 빼앗겨 우리 신체 감각기관을 온전히 활용하지 못 하고 있다. 기계로 인해 더 둔화된 것이다.
특히 융합은 국어, 수학, 과학, 영어, 미술, 음악 등 각종 교과목을 섞으면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아이들이 집과 학교와 학원을 번갈아 가며, 많은 정보기기와 일상을 보내기에 자기의 온몸을 열어젖혀 세상을 지긋이 바라보고, 흡수할 여유도 주지 않은 채 돌고 있다. 그 속에서 여유라면 현실세계를 탈출하는 게임과 인터넷과 핸드폰 속 IT(Information Technology) 세계일지도 모른다.
지난 주말, 숲에서 활동하며 아이들 신체 감각기관을 열어 스스로 그 기쁨을 향유하도록 상황을 의도적으로 유도해봤다. 추위 속에서도 햇볕은 따스하게 대지를 비추고, 물소리와 갖가지 새소리,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코끝으로 전해오는 신선한 공기,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눈부시게 빛나는 푸른 하늘과 퇴색한 겨울 숲의 모습들. 이 상황에서 “너무 편하고 기분이 좋아요”라는 한 아이의 대답이 돌아온다. 아이는 선생님 의도를 알아차리고 대답했을까? 자기 몸과 마음이 반응하는 그대로를 이야기했을까? 나는 후자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교육자로서 기쁨을 만끽한다.
앞서 나는 ‘포노 사피엔스’라는 기준 설정에 대해 ‘판단중지’라는 애매모호한 상태로 이야기했다. 여기에는 미래권력이라 불리는 ‘Z세대’가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여러 정보기기를 접해왔지만 의외로 오프라인에서 소비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데, 오히려 이들에게서 인간 본성인 감성과 경험의 중요성을 더 찾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포노 사피엔스’이기 이전에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다. 온라인과 모바일, 인공지능(AI)에 의존해 살고 있지만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존재다. 그러한 견지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교육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10년째 이어온 ‘문화교육연구소田’. 내 정체성으로 내 성씨 밭 ‘田’의 의미이며, 연구소가 있는 곳이 밭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세월의 흐름 따라 바뀌되, 자연과 사람을 잇는 장소로, 사람과 사람을 잇는 도구로 감성과 경험을 이야기하기를 소망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思(생각)’라는 글자가 ‘밭에서(田) 마음을 씀(心)’이라 했던 것처럼 더욱 인간적이고, 교육적인 활동을 위해 마음 씀씀이를 다잡아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