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이천만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만국 앞에 독립을 이루기를 선언하노라… 조선은 늘 우리 겨레의 조선이오 한 차례도 통일한 국가를 잃고 다른 민족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은 적 없도다… 일본이 만일 우리 겨레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한다면 우리 겨레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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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길 시인 보광중학교 교사 ‘영남알프스, 역사문화의 길을 걷다’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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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19년 2월 8일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일본과 세계 만국에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일본이 불응하면 피의 전쟁을 할 것이라 선언한 ‘2.8독립선언서’의 일부다. 이 선언에는 주도적 역할을 한 양산 상북면 상삼마을 출신 김철수(1896~1977)가 있었다.
상삼마을은 상북면 소재지 석계와 양산천을 마주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상삼마을에서 1km 떨어진 좌삼마을은 1907년 의병장이 된 서병희(1867~1909, 좌삼리 97)의 고향이고, 김철수의 집(상삼리 328) 가까이에 서병희에게 군자금 5천엔(약 50억원)을 제공한 김병희(1851~1908) 의병장의 집(상삼리 401)이 있다.
1907년 6월 한의업 출신 의병장인 서병희 부대가 당시 하북면사무소가 있던 성천마을 여인숙을 습격해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2명과 조선인 앞잡이 3명을 참살했다. 그러자 부산경찰서 수비대(또는 일본에서 파병된 의병토벌부대 제14연대) 50여명이 출동해 통도사 일대를 수색했다. 이때 서병희 부대가 도주하는 동안 김병희와 아들 교상은 자기 집 사병(포수 의병) 50여명과 일본군과 40분이 넘게 교전해 14명을 사살(혹은 중상)한다. 사병들은 도피한다. 하지만 김병희, 교상(1872~1908) 부자는 잡혀 고문을 당하고 성천마을 앞 소나무에 3일 동안 매달려있다가 각각 처형을 당한다. 시신은 하북 상감마을의 우동신과 통도사 구하 스님이 수습했다고 한다. 김병희 부자의 후손이 양산 오경농장을 일구었다. 서병희 의병부대가 양산ㆍ언양ㆍ울산ㆍ경주 일대에 활동할 때, 만석꾼 김병희의 도움이 매우 컸을 것이다.
현재 김철수의 집터에는 감나무만 있다. 기와집은 없어지고 돌담은 남아있다. 집터는 밭으로 변했지만, 규모로 보아 꽤 풍족한 집안이었다. 김병희의 집터는 만석꾼 모습을 지금도 보여주고 있다. 1896년생인 김철수는 어린 시절 서병희와 김병희 의병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 것이다. 의병들의 독립투쟁과 그 정신의 영향을 자연히 받았을 것이다.
어린 김철수는 부모님이 구포로 이사를 해 1913년 구포 구명학교를, 1917년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7월에 일본 동경의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이재과(理財科)에 입학을 한다.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에 가입하고 신익희(1894~ 1956, 상해 임시정부 국무위원), 이광수(1892~ 1950, 2.8독립선언서 작성, 소설가, 친일 변절자), 윤현진(1892~1921, 양산 상북면 소토리 출신, 상해 임시정부 재무위원장) 등과 교류하며,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 발간에 관여했다.
세계 제1차대전 종전과 전후처리 과정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은 약소민족의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했다. 당시 재일유학생들 사이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일제 식민지통치를 반대하고 민족자결을 요구하는 의사를 반영하기 위한 거족적인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김철수도 그런 유학생이었다. 1919년 2월 8일 조선청년독립단의 ‘2.8독립선언’의 11명 대표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김철수는 참여했다. 만세운동은 동경 유학생의 거의 전부를 망라한 약 600명이 참가했다.
1919년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첫 봉화가 됐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식민지 국가들의 끈질긴 민족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세계사적 사건의 출발점이다. 그 출발 신호의 가운데에 양산 출신 김철수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김철수는 1919년 6월 26일 대심원(大審院)에서 불온문서를 인쇄 배포한 출판법 위반으로 9개월 옥고를 치르고 1920년 4월 2일 귀국해 고향에 내려온다. 당시 독립선언 만세운동이 최소 7년 이상 중형을 선고할 내란죄에 해당하지만, 주동자 모두가 불온문서를 인쇄 배포한 출판법 위반을 적용받은 것은 양심적인 일본인 변호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족자결의 사조가 팽창한 시대에 자기 나라의 독립을 부르짖는 것이 정당한 것이라 내란죄로 처벌할 수 없다”라고 무료로 변론했다.
귀국 후 김철수는 초대 양산청년회의 회장, 조선청년총동맹 상임위원, 조선물산장려회 경리부원, 신간회 검사위원 등으로 민중계몽운동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왜경은 김철수를 “긴 얼굴에 검은 피부. 눈초리가 올라가 있고 코가 크며 비만이다. 성행은 거칠고 폭력적이며 소행이 불량하고, 공산주의에 찬성하여 재외공산당과 연락하고 주의를 선전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일본에 협조하지 않는 김철수를 울산 비행장 건설장에 강제징용을 보내 노역하게 하고, 그 가족의 거주를 제한하는 파렴치한 짓을 일제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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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은 조선청년독립단 학생대표들이 9개월 간 옥고를 마친 후 찍은 사진. 가운데 줄에(왼쪽부터) 최팔용, 윤창석, 김철수, 백관수, 서춘, 김도연, 송계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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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와 같은 시기에 게이오대학 상과 야간부에 다니던 언양 출신의 신학업(1901~1975)이 있었다. 신학업은 2.8독립운동과 관련된 듯 독립선전 때문에 퇴학을 당한다. 그해 10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조사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국한다.
신학업은 언양 최초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는 신고송(월북작가), 이동계(소년, 청년, 사회운동가) 등이 있다. 그의 활동 영역이 양산에까지 미치는데, 그때 양산청년회장으로 있던 김철수와 만나게 된다. 한때 신학업은 서울 김철수의 가게 점원으로 있었다.
양산에서 신학업은 언양 출신의 김기오(훗날 대한교과서주식회사 사장, 현대문학 창간), 신영업(신학업의 형, 언론인), 이동계(언양 소년단 격문사건 연루자, 청년운동)와 함께 청년ㆍ농민ㆍ언론운동을 전개한다. 김철수가 전국적으로 활동할 때 양산 3.1만세운동 주역인 전병건(전혁)과 함께 언양 출신들이 양산의 사회운동에 참여한다. 전병건과 신영업은 1932년 양산 농민의 양산경찰서 습격사건 중심에 선다. 일제강점기 양산 농민처럼 직접 경찰서를 습격한 사건은 매우 드물다. 그만큼 양산의 항일 독립운동 기운은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신학업은 전병건(전혁)과 경남동부적색농민조합사건으로 구속돼 복역했다.
독립운동의 봉홧불을 올렸던 양산의 김철수와 언양의 신학업은 동경에서 양산까지 독립운동의 꽃을 피우며, 조선 민중들에게 자주독립 정신을 고취했다. 양산의 김철수, 전병건과 언양의 신학업, 신영업, 김기오는 1920년대부터 30년대 초반까지 양산과 언양의 청년 농민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자주독립선언을 하며 식민지 독립운동 선봉에 섰던 김철수의 고향 상삼마을에는 그의 흔적이 없다. 의병장 김병희의 흔적도 없다. 그들이 살았던 흔적은 없어도 그들이 추구했던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정신마저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올해는 2.8독립운동과 3.1만세운동 100주년이다. 꼭 한 번은 독립선언서를 읽어보는 것이 후손의 기본 도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