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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애국으로 일어나 죽는 순간까지 결의 지킨 영웅, 서병희..
기획/특집

애국으로 일어나 죽는 순간까지 결의 지킨 영웅, 서병희

엄아현 기자 coffeehof@ysnews.co.kr 입력 2019/02/19 09:40 수정 2019.02.19 09:40
의병전쟁, 목숨 바친 가장 치열한 항쟁
을사늑약 등 국운 기울자 의병부대 기상
양산에서는 서병희 의병부대 ‘활약’
2년간 일본 수비대와 게릴라식 전투

뜨거웠던 지난 100년, 선열들은 일제 지배에 항거하고 조국 독립을 위해 전국 곳곳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조국을 위해 총칼을 들었고, 만세를 외쳤고, 임시정부를 세우며, 마침내 독립을 일궈냈다. 3.1 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그 100년의 울림을 기억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서병희 의병장이 중심이 된 항일의병전쟁부터 세 번의 거사가 일어난 양산 3.1 만세운동, 그리고 임시정부의 핵심 인물인 윤현진 선생의 업적까지…. 양산의 항일독립운동사를 중심으로 뜨거웠던 지난 100년을 다시 기억해 본다.

<글 싣는 순서>
❶ 목숨 바친 치열한 항쟁, 항일의병전쟁
❷ 목 놓아 외친 대한독립만세, 3.1 만세운동
❸ 조국 독립운동의 산실, 대한민국 임시정부
❹ 잊지 않게 하소서, 위대한 선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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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기와 복장은 통일되지 않았지만 항일의병전쟁에 유생, 군인, 농민, 상인, 포수 등 각계각층이 참여해 대일 항전을 전개했다.
ⓒ 양산시민신문


항일의병전쟁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은 가장 적극적인 항쟁이었다. 물론 의병전쟁으로 일제를 내몰고 국권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35년의 식민지 통제 아래에서 강인한 저항 정신으로 끈질긴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을 했음이 틀림없다.

빼앗긴 조국 찾으러 한의사에서 의병장으로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해 우리의 국권을 침탈했다. 전국 각지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의병전쟁이 일어났고, 양산에서는 서병희(1867~1909) 의병장이 분연히 일어섰다.

서병희는 1867년 상북면 좌삼리 97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13세까지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20세 되는 해부터 서울에서 4년간 한의학을 배우고 돌아와 35세인 1902년부터 향리에서 한의원을 경영했다.

하지만 을사늑약, 외교권 박탈, 고정 강제 퇴위 등등 그 시절은 그를 평범한 시골 한의사로 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국운이 기우는 모습에 한탄해 1907년 2월 11일 한의원을 접고 서울로 올라가 임진강ㆍ한탄강 쪽에서 활약하던 의병장 허위 휘하(장군의 통솔 아래 있는 진영)로 들어갔다. 이때 의병을 정미의병이라 하는데, 해산당한 대한제국 군인이 무기를 가지고 의병에 합세해 이전 의병에 비해 화력이나 전술이 월등히 높았다.

1908년 1월 이인영 총대장이 지휘하는 전국의병연합부대인 13도창의군은 군사장 허위를 선봉으로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했다. 서병희는 이때 허위의 의병 300명과 함께 선봉에서 싸웠지만,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작전은 실패했다.

서울탈환작전 실패 후 서병희는 허위 대장으로부터 경상도에 가서 의병을 일으키라는 명을 받았다. 서병희는 해산된 전 대한제국 군인 51명을 인솔해 영남지역으로 잠입했다. 경북 경주군 산내면에 있는 아미산에 들어가 이곳에서 활동하던 윤정의와 합세해 거사를 위한 훈련에 돌입했다.

↑↑ 1904년 일본수비대가 항일의병들을 학살하고 있다. 이 삽화는 프랑스 일간지인 ‘라 크로와 일뤼스트레’ 1905년 5월 21일자에 실린 것이다. 독립기념관 자료실 사진출처
ⓒ 양산시민신문


독립 부대 갖추고 경상도에서 활약

1908년 윤정의 부대와 합동으로 울산 일본 수비대를 습격하고 이어 경주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했다. 그해 6월 윤정의와 결별한 뒤 고향인 양산에서 독립 의병부대를 꾸린 서병희는 2년에 걸쳐 체포될 때까지 끊임없이 전투를 전개하면서 일본 수비대를 괴롭혀왔다.

1908년 2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경주, 양산, 산청, 합천, 창원, 진주, 의령, 고성 등 경남 일원에서 14차례 일본수비대와 교전하면서 일본 수비대원, 관공서, 일본 상인, 친일파 등을 공격했다.

특히 1909년 5월, 함안군 군북시장에서 일본인을 응징하고 일본 수비대와 경찰서에 각성을 촉구하는 격문을 보내기도 했다. 격문에는 일본제국주의 만행을 규탄하고 일본 침략에 대한 의병활동 정당성과 일본인 귀국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7월에는 부하 30여명을 거느리고 칠원주재소를 습격해 순사 1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군자금 800냥을 거뒀으며, 9월에도 창원 양전의 부호 박진사로부터 군자금 30원을 거뒀다. 10월에는 부하 18명을 거느리고 진주 가좌면에서 재무주사를 처단하고, 12월 의령과 고성에서 일본상인을 사살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 서병희는 국권상실을 끝까지 막기 위해 의병활동을 했던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이후 2008년 달성 서 씨 문중에서 서병희 생가터 인근에 재실을 건립해 위패를 모셨다. 또 그 광장에 서병희 추모비를 건립했다. 2009년 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탑에 그의 이름과 상훈을 기록했으며 충렬사에도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제향을 올리고 있다.
ⓒ 양산시민신문


죽음 앞에서도 대원들과의 절의 지켜

전국에서 의병대가 투쟁할 당시, 일제는 의병 섬멸을 위해 군경을 총동원해 추적했다. 그런 상황에도 서병희는 2여년 간 게릴라식 유격전을 구사하는 등 비상한 전략으로 경남 일원에서 종횡무진 활동하며 일본군을 따돌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 같은 눈에 띄는 활약으로 일본 수비대의 체포 손길이 점점 다가오자 창원 내서면 사율리에 은신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밀고에 의해 10월 11일 체포됐고, 의령수비대에서 취조받다 향년 43세로 순국했다.

서병희는 체포된 후에도 대원들과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붙잡히는 날에 대비해 기록지에 주소와 성 씨를 제외한 이름만 적는 등 대원들 신상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취조 과정에서도 대원들 주소와 은신처를 묻자 “잘 모른다, 빨리 죽여 달라”며 끝까지 대원들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 서병희는 국권상실을 끝까지 막기 위해 의병활동을 했던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이후 2008년 달성 서 씨 문중에서 서병희 생가터 인근에 재실을 건립해 위패를 모셨다. 또 그 광장에 서병희 추모비를 건립했다. 2009년 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탑에 그의 이름과 상훈을 기록했으며 충렬사에도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제향을 올리고 있다.
ⓒ 양산시민신문


일본 수비대 총격한 가병 포수들

의병부대의 항일운동이 한창인 1908년 양산에서 가병(포수)이 일본 수비대에 총격을 가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당시 서병희 의병부대가 일본 고리대업자 2명과 그 하수인 3명을 참살했다. 이에 일본 수비대가 서병희를 체포하기 위해 통도사 일원을 수색하며, 야산에 농군으로 위장해 매복근무를 했다. 이 때 만석꾼 가문으로 재산보호를 위해 고용한 김병희(1851~1908)의 가병 포수들이 일본 수비대를 산적 떼로 오인하고 집중 사격해 교전이 일어났다.

이 일로 김병희와 그의 아들은 철사로 두 손바닥을 꿰뚫어 묶인 채로 끌려다니며 갖은 고문을 당한 뒤 총살당했다. 김 부자의 죽음은 일본 수비대가 서병희 부대를 체포하지 못한 분개심으로 ‘ 대적행위를 하면 이렇게 된다’는 비인간적인 전시효과를 노린 악랄한 수법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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