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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100년 전, 양산사람들이 외친 세 번의 함성 “대한독립..
기획/특집

100년 전, 양산사람들이 외친 세 번의 함성 “대한독립만세”

엄아현 기자 coffeehof@ysnews.co.kr 입력 2019/02/26 09:19 수정 2019.02.26 09:19
양산지역 3.1만세운동, 세 번의 거사
하북 신평장터에서 경남 첫 만세운동
2천여명 군중 참여한 양산읍 만세운동
타 지역 만세운동서 활약한 양산선열들
모두가 목 놓아 외친 “대한독립만세”

양산, 위대한 역사를 기억하다

뜨거웠던 지난 100년, 선열들은 일제 지배에 항거하고 조국 독립을 위해 전국 곳곳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조국을 위해 총칼을 들었고, 만세를 외쳤고, 임시정부를 세우며, 마침내 독립을 일궈냈다.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그 100년의 울림을 기억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서병희 의병장이 중심이 된 항일의병전쟁부터 세 번의 거사가 일어난 양산 3.1 만세운동, 그리고 임시정부의 핵심 인물인 윤현진 선생의 업적까지…. 양산의 항일독립운동사를 중심으로 뜨거웠던 지난 100년을 다시 기억해 본다.

<글 싣는 순서>
❶ 목숨 바친 치열한 항쟁, 항일의병전쟁
❷ 목 놓아 외친 대한독립만세, 3.1만세운동
❸ 조국 독립 운동의 산실, 대한민국 임시정부
❹ 잊지 않게 하소서, 위대한 선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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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3.1만세운동의 열풍이 전국을 뒤덮던 시절, 양산의 3.1혁명도 실로 치열했다. 수백 수천명의 군중이 목 놓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무수한 인원이 일경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다.

양산의 3.1만세운동은 모두 세 차례 일어났다. 경남지역 첫 만세운동인 하북 신평장터 만세운동을 비롯해 양산읍에서도 두 번의 봉기가 있었다.

↑↑ 2018년 3월 10일 ‘제12회 양산 3.1만세운동 재현행사’가 양산종합운동장과 북부동 일원에서 펼쳐졌다. 3.1만세운동 재현행사는 양산의 얼을 기념하는 구심점을 형성하고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지난 2006년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양산시민신문


통도사 승려와 학생들이 주도한 신평 만세운동

먼저 통도사 만세운동이라고도 부리는 신평장터 만세운동은 만해 한용운 스님의 전략으로 시작해 오택언 스님을 중심으로 진행된 거사다. 이후 해인사와 표충사 만세운동까지 이끌어낸 남다른 의미를 지닌 운동으로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통도사 출신인 오택언(1987~1970) 스님은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한 명이었던 만해 한용운 스님의 밀명에 따라 백성욱ㆍ김상헌ㆍ신상완ㆍ정병헌ㆍ김대용ㆍ김봉신ㆍ김법인 등과 함께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만해 스님의 밀지를 품고 3월 5일 통도사에 도착했다.

통도사 지방학림 학생대표였던 김상문과 통도사 스님 등에게 서울 만세운동 과정을 설명하고, 거사를 추진하던 중 비밀이 누설돼 3월 7일 일본 경찰에 검거, 보안법 위반으로 서울로 압송됐다.

하지만 통도사 보통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대표 김상문을 비롯한 양대응, 박세문, 이기주, 김진오 스님 등 40~50여명의 학생과 불교강원 학인 승려 10여명, 통도사 거주 승려 10여명은 예정대로 장날인 3월 13일 신평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했다.

당시 신평장터 동쪽 도로에 짚으로 만든 밧줄을 놓고 줄다리기를 준비 중이었는데, 이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주동자들이 소리를 지르며 신평시장 사방으로 흩어졌고, 붉은 띠 모자를 쓴 사람을 따라 이동하면서 장터에 모인 사람들은 만세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최근 줄다리가가 아닌 통도사 양대응 스님이 나뭇짐에다 짚으로 불을 질러 사람을 모았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역사 사실을 제대로 밝힐 학술연구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날 일어난 만세운동은 인근 지역에 영향을 줬다. 통도사 승려 50여명이 찾아가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모의해 3월 31일 해인사, 4월 4일 표충사 단장장날 만세운동을 벌이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주동 청년들 감옥에 갇힌 양산읍 3.1만세운동

↑↑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9인이 참석해, 우리나라가 독립국이며 우리 민족이 자주민임을 천명하는 독립선언식을 했다.
독립기념관 자료실 사진출처
ⓒ 양산시민신문


한편, 양산읍에서도 두 차례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양산읍 중부동에 살던 청년 엄주태(당시 20세)는 3월 11일 부산진 일신여학교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감격과 의분에 차 이튿날 혼자 부산 일원을 돌아보고 친척집에서 하루를 더 보낸 후, 3월 13일 동래고보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했다.

이후 학생들이 뿌린 독립선언서와 공약서ㆍ경고문 등을 주워 감춘 채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이웃 선배인 전병건과 의논해 양산의거를 계획하고 양산장날인 3월 27일 첫 번째 만세운동을 벌였다. 장터 한복판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변하고 삽시간에 장꾼 3천여명이 함께해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이날 일본헌병 경찰은 만세시위를 주동한 엄주태ㆍ전병건을 비롯한 청년 7명을 체포했다. 하지만 성난 군중들이 옷을 벗어들고 ‘우리 전부를 구속하라’고 외치자, 하는 수 없이 석방했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 잠자고 있던 주동 청년 7명을 재구속해 부산감옥에 수감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4월 1일 재궐기가 일어났다. 1차 의거에서 피신한 이귀수ㆍ류계문 등이 주동이 돼 2천여명의 군중이 시가지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양산 출신 독립운동가 전국 각지에서 ‘활약’

이 밖에도 다른 지역 만세운동에 참여한 양산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많다.

1919년 2월 선언한 ‘2.8독립선언서’는 3.1 혁명의 도화선이 된,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절대 빼놓아선 안 되는 독립선언이다. 이 운동에 참여한 11명 대표 가운데 양산 상북 출신의 김철수가 있었다. 선언 후 일본 경찰에 체포돼 형을 받아 옥고를 치른 후 1920년 3월 9일 출옥해 고향에 돌아왔다. 이후 양산청년회를 창립하는 등 민중계몽운동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서 왔다.

또 서울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오택언ㆍ김형기 외에도 많은 양산 출신 인사들이 부산 동래고보 만세운동, 부산 범어사 만세운동, 부산 좌천 만세운동, 대구 만세운동, 진주농업학교 만세운동, 충청도 만세운동 등 전국 각지에서 목 놓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 3.1만세운동 때 학생이었던 노영렬 여사가 일군에게 인두 지짐 고문을 당하고 있다.
독립기념관 자료실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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