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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신기리 산성 최초 축조 시기 5세기 아닌 7세기 말이다..
문화

“신기리 산성 최초 축조 시기 5세기 아닌 7세기 말이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9/02/26 09:49 수정 2019.02.26 09:49
■ 신기리 산성과 고대양산 학술대회
나동욱 부산시립박물관 학예사
부산 배산성지 등과 석축기법 비교
유사시 인근 주민 대피소 역할 수행

그간 알려진 축조 시기, 역할 뒤집어
“발굴조사 통해 실증 자료 찾아야”

사적 제97호 신기리 산성 정비방안
① 신기리 산성에 대한 새로운 주장
② 신기리 산성 석축과 주변 훼손
③ 신기리 산성 종합정비안

ⓒ 양산시민신문

사적 제97호 신기리 산성 축조 시기가 사학계나 향토사학자들 사이에서는 5세기라는 기존 학설을 뒤집고 7세기 후반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또한 신기리 산성은 조선 후기 1703년 금정산성을 축조하기 전까지 동래와 언양 등 인근 지역주민이 유사시 대피해 생활하며 전쟁에 대비했다는 새로운 역할론이 대두했다.

지난 22일 양산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나동욱 부산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신기리 산성의 성격’이라는 주제 발표에서 신기리 산성은 신라가 삼국통일 후인 신문왕 7년(687년) 쌓았다는 삽량주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삼국사기’에 “삽량주에 쌓은 성이 둘레 1천260보”라고 기록된 것이 이를 입증한다는 것.

나 연구관은 “부산 배산성지의 층단식 성벽과 수직상 성벽이 공존하고, 처음 아래 성벽 위 수축성벽은 거제 둔덕기성이나 김해 분산성 수축성벽과 동일한 기법으로 통일신라시대 이후나 고려시대 성벽에서 확인되는 축성기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비마립간 6년(463년) 삽량성에 왜구가 침범해 변방에 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하북 순지리 산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순지리 산성은 토성으로 산성산(342.7m)에서 서남쪽 능선 끝부분(195m)에 있는 950m 길이로 능선을 따라 축조한 포곡식(抱谷式) 산성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신기리 산성 축조 시기가 당초보다 224년 늦어지는 것이다. 그동안 사학계와 향토사학자들은 자립마립간 당시 삽량성은 신기리 산성일 것으로 추정해왔다.

ⓒ 양산시민신문

양산읍사(2009년)에서는 신기리 산성에 대해 “463년 축조한 삽량주성은 신기ㆍ북부리 산성 두 곳을 말하는 듯하다”고 돼 있다. 양산시지(2004년)는 시기를 특정하지 않고 “삼국사기 기록의 성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산성 내 출토 유물에서 신라 토기가 다량 발견된 점으로 미뤄 신라 때 축성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고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이번 발표에 따르면 신기리 산성 석축 수법이 기초부 성벽은 25~40cm 장방형 석재로 품(品)자 형 바른층쌓기를 하고 기단부에서 위로 갈수록 단마다 2~3cm 안으로 들여쌓기 등 다양한 축조방식이 혼재돼 있었다.

또한 돌을 깬 채석장이 3곳 정도 확인됐고, 돌출된 4곳에 낙동강과 양산천 하류를 잘 볼 수 있는 망루가 있었다. 또한 남문과 동문 외에 적이 잘 알지 못하고 유사시 사용하는 암문(暗門), 높이차 때문에 위아래로 여닫는 현문(懸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현장을 확인한 학자들은 대체로 신기리 산성이 처음 축조된 이후 3차례 이상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거친 것으로 분석했다.

신기리 산성은 과거 성황산성으로 불렸으며 조선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산성곽조에 따르면 둘레 4천368척, 높이 6척이며 성내에는 우물 6곳, 연못 2곳, 군 창고가 있었다. 성 북서쪽에 있는 성황사(城隍祠)는 고려 개국공신으로 신라 말기 지역 호족이었던 김인훈(金忍訓)을 모신 사당이 있어, 이곳 정상의 산은 성황산(330.6m)으로 불린다. 

나동욱 연구관은 신기리 산성이 조선 후기 1703년 금정산성이 축조되기 전까지 기장, 울산, 언양, 동래 주민이 유사시 피신해 기거하는 입보용산성(入堡用山城)으로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넓은 성곽 안에 풍부한 수원과 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의 땅 등을 종합할 때 많은 주민이 생활할만한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동안 신기리 산성은 바다와 낙동강 하류를 통해 배를 타고 올라오는 적의 북침을 막기 위한 전략적 위치 때문에 단순히 전쟁에 대비한 성으로만 봐왔다.

향토사학자들은 ”신기리 산성 축조 시기와 역할에 관한 새로운 주장이 제기된 만큼 양산 역사 바로 알기 차원에서라도 산성 발굴조사를 시행해 실증적인 유물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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