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위대한 역사를 기억하다
뜨거웠던 지난 100년, 선열들은 일제 지배에 항거하고 조국 독립을 위해 전국 곳곳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조국을 위해 총칼을 들었고, 만세를 외쳤고, 임시정부를 세우며, 마침내 독립을 일궈냈다.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그 100년의 울림을 기억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서병희 의병장이 중심이 된 항일의병전쟁부터 세 번의 거사가 일어난 양산 3.1 만세운동, 그리고 임시정부의 핵심 인물인 윤현진 선생의 업적까지…. 양산의 항일독립운동사를 중심으로 뜨거웠던 지난 100년을 다시 기억해 본다.<글 싣는 순서>
❶ 목숨 바친 치열한 항쟁, 항일의병전쟁
❷ 목 놓아 외친 대한독립만세, 3.1만세운동
❸ 조국 독립 운동의 산실, 대한민국 임시정부 ❹ 잊지 않게 하소서, 위대한 선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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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4월 프랑스 조계시역 보창로에 있던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
ⓒ 양산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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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중국 상해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수립했던 임시정부의 명칭이다.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민족운동가 모임인 신한청년당이 3.1만세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해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4월 13일 정식으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사실상 27년간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산실로, 8.15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존재한 유일한 기구였다.
이 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한 양산 출신 인사는 윤현진ㆍ이규홍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우산 윤현진(尹顯振, 1982~1921)은 임시정부 핵심 요원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부유한 관료 집안에서 출생해 조국독립 꿈꿔
윤현진은 상북면 소토리에서 아버지 윤필은과 어머니 김안이의 2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필은은 현재 부산시장격인 동래부윤과 경상우도 관찰사, 동래부 감리서 등을 지냈고, 할아버지인 윤홍석도 동래부사와 사천군수를 지낸 구한말 관료 집안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성품이 후덕하고 총명했던 윤현진은 17세 되던 1909년 중국 남경과 북경, 상해 등을 돌아보면서 외국 여러 인물을 만나 국제정세를 익혔다. 특히 북경에서 청나라 내분을 보면서 새 시대에 적응하려면 그 시대에 맞는 식견과 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1912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 윤현진은 일본 명치대학 법과에 입학해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조선광복동맹결사단을 조직해 총무로 활동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펼쳤다. 또 1915년 일본에서 김철수와 비밀결사를 조직했고, 1916년 초에도 김철수ㆍ정노식ㆍ장덕수를 포함해 중국인들과 함께 신동아동맹을 결성했다. 그 뒤 귀국해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 구포은행 등에 관여하는 한편, 대동청년단에 가입하면서 많은 동지와 같이 활동했다.
윤현진은 또 일본인 상권에 대항하기 위해 의춘양행을 설립ㆍ운영했는데, 일본상품을 배척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근대적 회사이자 우리나라 최초 국민소비조합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학교를 졸업한 뒤 일제가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윤현진을 매수하려 했지만 냉철하게 거절하고 귀국해 1917년 고향인 양산에 의춘의숙을 설립했다. 의춘의숙은 청소년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하고, 항일독립정신을 배양하는 후진양성 기관이었다. 의춘(宜春)은 양산의 옛 지명이다.
이후 윤현진은 1919년 3월 26일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했다. 윤현진이 중국 망명길에 오른 것은 1919년 발생한 3.1만세운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윤현진은 당시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이었는데, 마산 혹은 양산에서 만세운동을 했고, 일제 탄압으로 이어져 중국으로 망명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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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행정부) 성립을 기념해 촬영한 사진이다. ①윤현진 ②안창호 ③신익희 ④현순 ⑤김철 ⑥최창식 ⑦이춘숙 |
ⓒ 양산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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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핵심 인물로 재정 도맡아1919년 4월 윤현진은 울산의 민족주의자 김홍조와 함께 상해에 모습을 드러낸다. 안창호, 이동휘, 김구, 김규식, 여운형, 신익희, 이동녕 등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 핵심 인물로 참가했다.
윤현진은 활동은 국사일지(國事日誌)에 자세히 나타난다.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3일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고 조선 8도와 해외 3지역을 포함한 11개 지방의원을 선출했다. 그때 윤현진은 김창숙, 유경환, 김정묵, 백남규, 김갑 등과 함께 경상도의원으로 선출됐다.
8월에는 국민법령으로 임시정부 부서를 위원제에서 차장제로 변경했는데, 윤현진은 차장으로 임명돼 1921년 3월 22일까지 재임했다. 윤현진이 재무차장을 맡게 된 것은 윤현진의 자금조달 능력을 높이 평가한 안창호의 계속된 설득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국사일지에는 윤현진이 임시정부 재정 확보를 위해 노력한 모습이 기록돼 있다. 회사를 설립해 주식회사 기금을 확보하고, 회사를 운영해 자금을 조달하자는 구상을 제안한 내용이다.
윤현진의 임시정부 자금 조달은 그의 형인 윤현태와 관련이 깊다. 윤현태는 백산무역 설립에도 깊이 관여했고, 1919년에는 양산지역 지주들과 함께 일금상회를 경영했다. 1920년 초에는 양산에서 의춘양행을 운영했다. 윤현태의 적극적인 회사활동은 조금조달에 큰 도움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윤현진은 김구, 김순애, 김철, 손정도 등과 함께 상해에서 의용단을 조직했다. 당시 의용단은 국내 조직을 만들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이후 전국 조직으로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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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 양산의 애향단체인 춘추계가 중심이 돼 춘추공원에 양산군민 일동의 이름으로 성금을 모아 윤현진 추모비를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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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 꽃다운 나이에 안타까운 요절윤현진은 구국의 일념으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병을 얻어 광복의 한을 풀지 못한 채 1921년 9월 17일(음 8월 16일) 이역만리 상해에서 순국했다. 향년 30세로 너무나 아까운 나이였다. 비보를 접한 국내ㆍ외 수많은 애국지사는 그의 서거를 애통해했다고 한다.
일제의 <조일신문>에서도 ‘형극 배일수완가 윤현진의 死’(일본에 대항하는 수완가 윤현진의 죽음)란 제목으로 보도하면서, 그의 사망은 임시정부의 폐망이라고 논평하며 대서특필했다.
그만큼 일본에서도 무서운 존재였다는 것이다. 윤현진의 장례는 임시정부 국장으로 치러졌고, 임시정부의 안창호, 김구, 여운형 등이 참석해 애도했다. 유해는 상해 정안사 외인묘지(현 만국공묘)에 안장됐다.
윤현진의 형 윤현태는 동생 죽음을 슬퍼하면서 상해 정안사에 있는 윤현진 묘소를 찾아 그곳에 ‘윤현진 묻음’이란 비석을 세웠다. 윤현진은 “독립하지 않으면 나의 유골은 고국산천에 묻지 말라”, “독립하지 않으면 나의 자녀를 혼가시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의정원의 막중한 임무 수행한 이규홍
이규홍(李圭洪, 1893~1939)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한 또 다른 양산 출신 인물이다.
이규홍은 상북면 출신으로 어려서 한학을 배운 후 일본 명치대학 법학부에 유학했다. 대학 졸업 후 1919년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청년단 출판부장을 역임하고 같은 해 임시정부 내부차장, 임시정부 학무차장까지 역임했다.
이후에도 임시정부 의정원 위원, 부의장, 국민대표회기성회 의원을 지냈고, 1926년에는 김구의 추천으로 국무원에 임명돼 임시헌법개정 기초의원으로 활동했다.
이처럼 의정원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며 일신을 돌보지 않은 격무로 병을 얻어 1927년 말 고향으로 귀국했다. 가족 간병으로 두문불출 신병치료에 전념했지만 호전되지 못하고 1939년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규홍의 임시정부 활동사실은 확인됐지만, 1930년 이후부터 사망까지 행적 불분명 등 사유로 포상받지 못하고 현재까지 독립유공자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