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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38인의 양산 출신 영웅 모두가 함께 꿈꾼 ‘대한 독립’..
기획/특집

38인의 양산 출신 영웅 모두가 함께 꿈꾼 ‘대한 독립’

엄아현 기자 coffeehof@ysnews.co.kr 입력 2019/03/12 10:41 수정 2019.03.12 10:41
독립단체 참여, 개인 투쟁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 한
양산 출신 독립유공자 38인

이들과 함께 목숨 바쳤지만
제대도 된 기록 남지 않아
미서훈자 된 영웅도 상당수
“독립유공자 재조명 필요”

양산, 위대한 역사를 기억하다

뜨거웠던 지난 100년, 선열들은 일제 지배에 항거하고 조국 독립을 위해 전국 곳곳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조국을 위해 총칼을 들었고, 만세를 외쳤고, 임시정부를 세우며, 마침내 독립을 일궈냈다.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그 100년의 울림을 기억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서병희 의병장이 중심이 된 항일의병전쟁부터 세 번의 거사가 일어난 양산 3.1 만세운동, 그리고 임시정부의 핵심 인물인 윤현진 선생의 업적까지…. 양산의 항일독립운동사를 중심으로 뜨거웠던 지난 100년을 다시 기억해 본다.

<글 싣는 순서>

❶ 목숨 바친 치열한 항쟁, 항일의병전쟁
❷ 목 놓아 외친 대한독립만세, 3.1만세운동
❸ 조국 독립 운동의 산실, 대한민국 임시정부
❹ 잊지 않게 하소서, 위대한 선열들

양산지역 항일독립운동은 항일의병전쟁과 3.1만세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만 그치지 않았다. 양산 출신의 많은 인사가 수많은 독립단체에 참여하거나 개인적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쳤던 양산 출신 선열들을 소개한다.

ⓒ 양산시민신문

군자금 모집에 뛰어든 승려 김상헌


김상헌(金祥憲, 1893~1945) 선생은 동면 출신으로 어려서 동래 범어사에 출가해 범어사 지방학림 과정을 마치고 서울 불교 중앙학림으로 유학했다. 그는 유심회(만해 한용운 선생 지도 아래 민족사상 고취와 불교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에 가입해 교리와 민족문제 연구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김 선생은 신상완으로부터 국내 불교계 유력 인사를 상해로 보내 달라는 밀지를 받고 상해 임시정부에 갔다가 안창호로부터 자금 모집과 전국의용승군 조직 등 밀령을 받고 국내로 돌아왔다. 이후 1920년 ‘철원애국단’에 가입해 함경남도와 강원도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아 안창호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조선전도’ 5만분의 1 지도를 구입해 보내기도 했다.

이런 활동으로 1920년 일본 경찰에 붙잡혀 보안법과 정치범죄처벌령 위반 등으로 징역 3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범어사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쓰다 광복을 맞았다. 김 선생은 1963년 대통령 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농민조합원 지키다 순국한 윤복이

윤복이(尹福伊, 1844~1932) 선생은 양산면 출신으로 농업에 종사했다. 그러던 중 1931년 4월 4일 창립한 양산농민조합 조합원으로 가입해 일제 소작료 착취에 항거했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에서 소작료 인하를 결의했으며 조합원 수백명이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시위 군중을 해산하고 이기주 등 주동자 16명을 체포했다. 이들은 다음 날인 17일 부산형무소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소식을 들은 윤 선생은 농민조합 양산읍 연락책임자로서 조합원 300여명과 함께 양산경찰서를 습격했다. 조합원이 구속자를 무조건 석방하라고 외치며 경찰서 안으로 진입하려 하자 경찰서장은 직접 실탄을 장전해 발사했다. 이때 윤 선생은 왼쪽 어깨뼈에 총상을 입고 5시간 만에 타계했다. 윤 선생은 1986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 양산시민신문

애국 인재 양성한 교사 김말복


김말복(金末福, 1909~1985) 선생은 하북에서 태어나 통도사로 출가해 일본에서 유학했다. 1940년 통도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불교학과 국어, 동양사 과목을 가르쳤다. 이즘 일본이 우리나라 역사는 물론 문화, 언어와 민족정신마저 말살하자 수업 시간에 항일독립 사상과 민족의식 고취 등 애국 인재를 양성하는 데 전력했다.

그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규식이 쓴 만장 내용을 교육한 것이 탄로 나 1941년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으로 통도중학교는 강제 폐교됐고 해방 후에야 보광중학교로 재건될 수 있었다. 1964년 보광중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다 정년퇴임했다.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죽는 순간까지 독립운동한 이석윤

이석윤(李錫允, 1899~1986) 선생은 하북면에서 태어나 함경남도 안변군 문산면 사기리 석왕사에서 승려 생활을 하다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 선생은 1919년 5월 신상완과 함께 독립선언문과 독립취지문을 배부했다. 이후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상해에 있던 이종욱이 보내온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를 받고 강원도 건봉사 주지 이대연과 주승 정인목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해달라는 서한을 전달했다. 이 일로 선생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1920년 4월부터는 ‘철원애국단’에 가입해 강원도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옥살이한 후에도 전남 대전군에서 군자금 100원을 수납해 임시정부로 송금했으나, 이 일로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대전으로 압송되는 도중 기차에서 탈출했으나 체포돼 심한 고문을 받았다. 심한 고문과 기차에서 탈출했을 때 다쳐 폐질 상태로 지내면서도 독립운동가를 보호하고 사전 정보를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진행했다.

정부는 이 선생 공훈을 기려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서병희와 함께 항거한 서두성

서두성(徐斗成. 미상~1908) 선생은 상북면 좌삼 출신으로, 서병희 의병장 부하로 국내 의병활동을 펼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서 선생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러나 1908년 7월 31일 경상남도 황협 관찰사가 내부대신인 송병준에게 보고한 내용을 통해 1908년 양산군 일원에서 활동하던 서 선생이 의병활동 중 체포돼 같은 해 6월 13일 일본 수비대에 의해 상북면 대석리 원효암 중로 만세봉 부근에서 사살돼 순국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국가보훈처 포상 공적 조서에는 서병희 의병장 아들이라고 기재돼 있으나 서병희 의병장은 아들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만큼, 서 선생은 서병희 의병장의 가까운 친척이거나 휘하 의병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서 선생 공훈을 기려 2005년 국가보훈처 직권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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