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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 이전의 항일의병운동..
기획/특집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 이전의 항일의병운동

양산시민신문 기자 mail@ysnews.co.kr 입력 2019/03/26 10:21 수정 2019.05.07 10:21

■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

 
↑↑ 이병길
시인
보광중학교 교사
향토사학자
ⓒ 양산시민신문  
올해는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양산에서도 10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9일 신평 하북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이에 앞서 지난 8일 (사)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주관 ‘하북 신평 만세운동 100주년 학술대회’가 열렸다. 동부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신평 만세운동을 조명한 첫 번째 학술대회로, 학계와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가운데 향토사학자 이병길 씨가 발제한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의 내용을 정리해 보도한다. 

머리말

1919년 3월 13일 양산 신평장터에서 통도사 스님이 중심이 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경남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하지만 이 운동에 대한 기록의 부재로 이제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양산 통도사는 영남알프스의 한 축인 영축산 아래에 있다. 영축산 맞은편에는 원효대사 전설이 깃든 천성산이 자리하고 있다. 영축산~신불산~천황산~가지산~운문산 등 영남알프스는 양산, 언양(울산), 밀양 고을과 서로 연결돼 있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항일독립운동의 기운이 드센 곳이다. 언양은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돼 언양 4.2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밀양은 3.1만세운동이 아홉 번이나 일어난 고장으로 의열단인 김원봉과 윤세주, 최수봉 등이 있다. 양산은 대한제국 때 서병희, 김병희 의병장이 활동하고, 1932년 양산 농민이 양산경찰서를 습격해 가장 강렬하게 항일운동을 한 고을이다. 하지만 통도사 스님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평 3.13만세운동에 대해서는 그동안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이라 명칭을 붙인 것은 신평장터 독립만세운동을 통도사 스님이 주도했기에 주체 세력과 지명을 결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봐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이라 했다.

이 글은 역사적 자료가 빈곤한 상황에서 작성한 것이다. 여러 단편적 자료를 정리하고,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에 부족한 부분은 다소 역사적 상상력을 가미해 보완하려고 했다. 만세운동 배경이 된 1908년의 상북면 서병희, 김병희 의병활동을 먼저 살펴보고, 1919년 전후 하북면 신평마을과 통도사 상황을 알아봤다. 그리고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 전개 과정과 그 의의를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 관련한 인물들 삶을 추적했다.

《경상도지리지(1425, 세종 9)》의 <민속소상(民俗所尙)>에 따르면 양산인의 성격은 ‘속상강려역농(俗尙强戾力農)’이다. 즉, 평소 농사에 열중하면서도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면 홀연히 떨쳐 일어나 적을 물리치는 상무(尙武) 정신이 배어 있다. 굳건하고 인내심이 강하고 의리와 절대를 중시하는 경상도인의 성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농사에 힘쓰면서도 부정의(不正義)에는 항쟁 정신을 발휘하는 기질이 양산인에게 있다.

1919년 3.1만세운동 이전에 양산인의 기질을 드러낸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상북면 서병희와 김병희 의병장이었다. 상북 좌삼마을과 상삼마을이 그들의 고향이다.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성천마을은 1918년까지 하북면사무소가 있었던 곳이다. 1908년 6월 13일 밤 11시께 상북면 좌삼마을 출신 의병장 서병희가 일본인 고리대금업자를 처단했다. -서병희, 김병희 의병 자료는 ‘양산항일독립운동사(양산향토사연구회, 2009)’ 41~68쪽을 참조했으나 일부 오류는 수정했다.

좌삼마을 서병희 의병장

정미년에 일어선 서병희 의병부대

한의업을 하던 서병희(1867~1909)는 양산 상북면 좌삼마을에 살고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보고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이미 국운이 쇠퇴하자 백성들이 일어나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고 있었다. 구한말에 일어난 의병운동은 위정척사 사상을 계승한 유생이 중심이 돼 일어난 적극적인 형태의 반외세운동이었다. 

가장 먼저 단발령과 명성황후 살해를 계기로 양반 유학자들이 의병을 일으켰다.(을미의병 1895) 다음은 일본이 대한제국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이 일어나자 양반인 민종식과 최익현, 평민인 신돌석이 의병을 일으켰다.(을사의병 1905) 그리고 외교권에 이어 경찰권과 재판권까지 일본이 빼앗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자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한다.(정미의병, 1907)

서병희는 1907년 10월 의병장 허위(1854~1908)의 부대에 참가했다. 허위의 제자가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인 울산의 박상진(1884~1921)이다. 1907년 12월 이인영(1868~1909) 의병장은 의병연합부대인 13도 창의군을 결성한다. 이때 평민 출신 신돌석 의병장은 배제된다. 양반 신분인 유생 의병장들에게 평민 출신의 존재는 전통적 신분질서를 문란하게 할 우려가 있었다. 이는 당시 양반 신분인 유생 의병장들의 사상적 한계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아무튼 1만여명의 의병이 통감부를 격파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서울 진공 작전을 펼친다. 서병희는 군사장 허위의 결사대 300여명과 함께 선봉장이 돼 나가 싸웠다. 일본군 선제공격으로 작전은 실패한다. 그 후 허위의 밀지에 따라 1908년 1월 31일 해산병 51명 -일제 자료인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6권 의병편Ⅸ,  隆熙 三年(一九○九ㆍ明治 四二), (二) 十二月, 慶尙道, 慶尙北道 梁山郡 中北面 左森洞 當時 住所 不定 暴徒 首魁 徐炳熙”에 따르면 5명이다. 하지만 독립운동사 자료집과 경주 산내 윤정의 부대와 합세 등을 본다면 51명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윤정의 의병 규모가 클 수도 있다. 일제 자료에는 양산지역 활동에서는 계속 5명으로 나온다. 경찰의 성천사건 조사에는 12명 정도로 나온다-을 인솔해 고향 양산으로 향한다. 그 가운데 14명이 양산 출신이었다.

서병희의 경남 동부지역 의병운동

고향으로 내려오는 길은 쉽지 않았다. 형색도 다양했으며, 무장을 했기에 산길을 주로 이용했을 것이다. 경주군 산내면 윤정의 의병부대와 연합해 화승총 58정, 양총 2정, 군도 1진(振)으로 무장한 68명의 의병부대가 됐다. 1908년 3월 21일 울산군 복안동(현 울주군 두서면 복안리)에서 일본 수비대와 일대 격전을 벌인다. 이 지역은 한국전쟁 때 빨치산 홍길동의 거점인 아미산과 가깝고 활천 고개는 경주와 언양으로 가는 길목이다. 의병 7명이 전사하고, 총기 40여정이 망가졌을 정도로 패배했다. 일본수비대 역시 인적ㆍ물적인 피해를 봤다.

ⓒ 양산시민신문

의병부대는 복안천을 거슬러 천마산과 백운산 자락을 넘어 소호마을을 지나 경주 산내면으로 경로를 바꿔 운문령을 거쳐 밀양 양산 배내를 향해 이동했다.

4월 3일 경주 산내면 저동-현재 경주 산내면에 저동(底洞) 지명은 없으며, 그 지역도 알 수 없다. 다만, 日富1里(일부1리)의 재궁(齋宮), 재궁(才宮)을 마을 어르신은 재동이라 부른다-에서 경주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고, 이때 또 부하 2명이 전사를 하고 총기는 사용 불가능했다. 5월에 윤정의 의병부대와 헤어지고, 양산사람 중심으로 부대를 재편한 후 부하 5명을 인솔하고 배내로 잠입한다. 양산군 하서면(현 원동면) 이천산(배내골) 중에서 잠복 중인 밀양 수비대와 6월 9일 교전한다. 고향 좌삼마을은 영남알프스 영축산 자락의 끝인 오룡산과 맞은편 천성산 사이에 있다. 양산과 밀양 경계인 배내골에서 골짜기를 따라 황계골이나 계황골을 넘으면 좌삼마을이 나온다. 밀양에서 양산으로 넘어오는 길이다.

서병희에게 군자금 50억원을 준 만석꾼 김병희

그런데 왜 서병희는 고향 마을에 오게 됐을까? 좌삼마을에서 1km 떨어진 상삼마을의 김병희를 만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김병희는 만석꾼 집안이었다. 부친 김재복(1824~1904)은 양산군 물금에서 가마솥과 농기구 등을 대량 생산하고 전라도 소금을 사들여 영남 일원을 무대로 장사를 해 30대에 만석꾼이 됐다. 음직 현감을 지내고 대구(大邱) 중군(中軍)을 역임한 후 자헌대부에 올랐다. 그는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가병(포수) 수십명을 상시 고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 상삼마을에는 만석꾼 집터가 남아 있다. 남아 있는 돌담길을 걸어보면 가로와 세로 길이 각각 70여 걸음이 된다. 마을 어른의 증언에 따르면 집터가 현재의 두 배 이상이라고 한다.

서병희는 어릴 때 김병희가 동몽교관(童蒙敎官, 초등학교 교사)으로 후진을 양성할 때 인근 마을에 살았기에 배우러 다녔을 것이다. 또 위정척사의 만인소 운동(1881)을 한 영남 유생의 정신을 또한 강조했으리라 여겨진다. 서병희를 만난 김병희는 군자금으로 5천엔(약 50억원)을 줬다.-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 1908년 6월 30일 기록

아마 일부 병력도 보충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병희의 도움은 서병희 의병부대에는 엄청난 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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