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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 이전의 항일의병운동..
기획/특집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 이전의 항일의병운동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9/04/02 09:47 수정 2019.04.02 09:47

■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

올해는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양산에서도 10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9일 신평 하북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이에 앞서 지난 8일 (사)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주관 ‘하북 신평 만세운동 100주년 학술대회’가 열렸다. 동부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신평 만세운동을 조명한 첫 번째 학술대회로, 학계와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가운데 향토사학자 이병길 씨가 발제한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의 내용을 정리해 보도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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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천마을에서 왜인을 처단하다

<이전 호에 이어> 서병희는 6월 13일 양산군 하북면 소재지 성천마을 여인숙에 일본인 고리대금업자가 숙박한다는 정보를 얻어 급습한다. 때는 야간이었지만 보름이라 달은 둥그렇게 빛나는 11시께였다. 여인숙 주인 최재덕은 출타 중이고, 아내 정시은과 아이 1명, 숙박인 5명이 있었다. 의병은 물빛 옷에 수건으로 머리를 둘러맨 장년 10여명과 백색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40세 전후의 사람 2명이었다. 모두 총포 또는 곤봉을 휘둘렀다. 40세 전후의 수염을 기른 키 큰 서병희는 집 동정을 살피고 지방 사투리로 고리대금업자를 훈계했다.

“우리가 통상을 거부하는 것은 너희 왜국과 접촉을 함으로써 파란곡절이 생겨 두 나라 사이 틈이 벌이지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이토 히로부미의 침략성 때문이다. 나는 너희 왜놈 상인들이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너희와 같이 억울하게 죽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909년 (음) 4월 14일 함안군 군북시장에서 일본인 1명을 구타 실신시킨 후 일제 수비대장과 경찰서장에게 보낸 격문의 내용이다.

↑↑ 달성 서씨 문중에서 상북 좌삼마을 향리에 세운 재실과 현재는 멸실돼 공터만 남은 서병희 생가터
ⓒ 양산시민신문


의병들은 실외로 끌어내어 총포를 발사하고, 기왓돌(瓦石)로 난타하기도 하고, 도검을 휘두르며 베었고, 휴대품을 수거했다. 불의의 습격에 저항할 틈도 없이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굴전(堀田), 길교(吉橋) 2명과 조선인 통역 앞잡이 3명을 처단했다. 큰 소란은 30여분이었다. 서병희는 여인숙을 나와 이웃집 전영준에게, 시신은 동장(洞長)에게 안내시키고 아침 일찍 처리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대오를 정비한 뒤 언양 방면으로 철수했다.

서병희 의병 부대는 그 후 서부경남지역인 산청군, 합천군, 함안군, 창원부, 고성군, 의령군 등지에서 일제 관공서를 습격했고, 일본 상인 등을 살상했으며, 일본수비대와 14회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1909년 12월 11일 창원부(현 창원시) 내서면 사율리에서 밀고를 받고 출동한 마산주재소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동안 의병 기습에 큰 피해를 봤던 의령수비대에서 신병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서병희 의병장은 거기서 순국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서병희 의병장 추모비가 상북면 좌삼마을에 있다.

만석꾼 김병희ㆍ교상 의병부대

서병희의 고리대금업자 처단 사건은 즉시 부산경찰서장에게 보고됐다. 울산 수비대와 교섭해 김해, 양산, 언양, 서창 수비대 8~9명을 각각 파견해 포위 소탕 작전에 착수했다. 통도사 주변 영축산과 천성산 일대는 일본 경찰의 수색 대상이었다. 김병희의 상삼마을 인근 야산에 일본 수비대원들 15명이 변장을 해 숨어있었다. 이를 발견한 김병희 가병들이 화적(火賊)떼 인줄 알고 6월 26일 오전 11시께-부산경찰서장 보고 『양산항일독립운동사』(양산향토사연구회, 2009) 41~68쪽 참조와 『진중일지』 기록이 일치함-상호 교전을 벌였다.

↑↑ 상북 좌삼마을에 있는 서병희 의병장 추모비
ⓒ 양산시민신문


김병희 가병은 만석꾼 집안 수호 임무도 있었기에 최신 화기로 무장했다. 당시 양총(洋銃, 대한제국 군대가 사용했던 서양 신식무기인 군총)과 권총(拳銃), 스나이더 총(미국산), 마르티니헨리 소총(영국산), 대구경총 등 화기를 갖췄다.-『진중일지』 6월 27일과 30일 기록을 토대로 함.

다소 막강한 화력이었다. 경찰 보고에 따르면 일본 수비대 1명이 중상을 입고, 마을 주민 강윤희(15)가 즉사했다. 7월 8일 통도사 극락암에서 1명을 참살(斬殺)하고, 13일 상북면 대석리에서 데려온 죄인을 천성산 원효암 중로(中路) 만세등(萬歲嶝) 아래에서 총살(砲殺)한다. 김교상과 김병희로 여겨진다.-족보에 따르면 김교상은 6월 20일, 김병희는 6월 22일 사망으로 기록돼 있다. 교상의 호적에는 6월 18일 사망이다. 음력으로도 10여일이 차이가 난다. 경상남도 관찰사 보고 제2232호에 따르면, 서병희 하남(下男) 서두성(徐斗成)을 총살했다 하나, 서병희에는 자식이 없다. 따라서 서두성은 서병희 부대원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사살된 백예오(白禮悟)도 마찬가지다.

↑↑ 상북 상삼마을에 있는 옛 만석꾼 집의 돌담길
ⓒ 양산시민신문


하지만 정미의병을 토벌하기 위해서 일본에서 파병 온 보병 제14연대 의병토벌 작전기록인 ‘진중일지(陣中日誌)’에 따르면 김병희ㆍ교상 의병부대 40명은 일본 정규군과 교전을 벌인다. 무려 40여 분간 쌍방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현장에서 14명이 사살 당한다. 김병희 가병들은 실상 숨은 의병들이었다. 일본군에 따르면 김교상은 인근 군의 지주를 규합, 그 세력이 왕성해 수개월 전부터 언양과 양산 사이에서 의병활동을 했다. 그 사이에 서병희는 양산 서북방에 있는 산인 영남알프스 일원으로 도주했다. 김병희 부자 의병부대는 결국 서병희 의병부대가 양산지역을 탈출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정체가 드러난 김병희(1851~1908)ㆍ교상(1872~1908) 부자는 체포된다.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부산일보, 1991년 2월 9일 김정식(金正軾)의 증언-일본군은 두 의병장을 철사로 손바닥을 꿰뚫어 묶은 채로 끌고 다녔다. 갖은 고문을 한 뒤, 하북면 소재지인 성천마을 앞 현재 통도사 자비도량 근처 소나무에 3일간 매달아 주민들이 보도록 한다. 일본에 저항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서병희는 통도사. 교상은 대석 골짜기에서 처형을 당했고, 두 분 시신은 상감마을 우동신과 통도사 구하 스님이 거뒀다.

김교상의 아들 김정훈(金正勳)은 울산의 선각자 김홍조와 본처 김정옥 사이에 난 딸 김순원(金順媛)의 딸과 결혼했지만 순원이 1926년 7월 사망한다. 그 후 1929년 1월 박명진과 재혼하는데, 그는 의열단원으로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박재혁(1895~1921)의 여동생이다. 현재 통도사 이름바위에 김홍조, 박영효, 김정훈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통도사 인근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했음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을 것이고, 이로 인한 항일 의식도 높았으리라 짐작한다.

이후 상북 상삼마을 출신 김철수(1896~1977)가 동경 2.8독립선언의 주역이 됐다. 서울 3.1운동에 참여했던 상북 외석마을에 살았던 재경 유학생 회장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 4학년 재학 중이었던 김형기(1896~1950), 통도사 스님인 오택언(1897~1970), 박민오(1897ㆍ99~1976)도 항일 의병운동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들이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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