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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의 배경..
기획/특집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의 배경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9/04/23 10:21 수정 2019.05.07 10:21

■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

올해는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양산에서도 10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9일 신평 하북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이에 앞서 지난 8일 (사)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주관 ‘하북 신평 만세운동 100주년 학술대회’가 열렸다. 동부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신평 만세운동을 조명한 첫 번째 학술대회로, 학계와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가운데 향토사학자 이병길 씨가 발제한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의 내용을 정리해 보도한다. 


↑↑ 통도사 성해 선사(聖海 先師) 회갑 기념사진
ⓒ 양산시민신문

통도사 불교전수학원

성해 스님은 통도사 황화각을 중수해 1918년 6월 불교전수부(佛敎專修部) 대강당을 마련했다.-서해담, 『통도사사적(通度寺事蹟)』, 통도사사무소, 1912, 14쪽- 1919년 신평 독립만세운동에 주도적 역할은 불교전수부 학생이 했다. 하지만 불교전수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사설통도사 불교강습회’, ‘사설통도사 학술강습회’, ‘통도사 전수학원’ 등 이름으로 불린 1934년 개교한 통도중학교(1934년 4월 1일~1944년 3월 31일)가 있었다. 1938년부터 43년까지의 ‘사설통도사 학술강습회 인가신청서’가 현재 보광중학교(1946~현재)에 보관돼 있다.

강습회는 해마다 인가를 받아야 했다. 1938년 인가신청서에 따르면 학교는 통도사에 위치하며, 4년제(갑조 甲組, 을조 乙組, 병조 丙組, 정조 丁組) 학교로 1년 3학기제였다. 학생 정원은 150명으로 하며, 이학 자격은 만 12세 이상 남자로 6학년 소학교(현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으로, 승려의 도제 또는 불교 신도 자제에게 중등 교육을 했다. 교과목은 수신(修身)ㆍ공민(公民)ㆍ국어(일본어)ㆍ조선어ㆍ국사(일본사)ㆍ영어ㆍ지리ㆍ불교 독본ㆍ능엄경ㆍ금강경ㆍ원각경 등으로 일반 과목과 불교 과목이 혼재해 있다.

이를 유추해 보면 통도사지방학림은 승려 중등교육기간으로, 불교전수부(전수학원)는 일반인 중등교육기관으로 통도사 경내에 있었다. 다만 정식 교육기관은 아니고 사설 기관으로 있다가 1934년부터 해마다 인가를 받은 정식 학교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사찰령과 통도사

1910년 5월께 정토종 승려와 통도사 일부 승려 사이에 통도사를 일본 정토종에 가입하려는 ‘가말(加末) 교섭’이 있었다. 젊은 승려들은 이에 비분강개하고 반발했고, 중앙 불교계 차원에서 내려온 해결위원 강대련은 통도사 스님들과 합세해 일본인 승려를 육박ㆍ축출했다.-정광호, 「일제의 종교 정책과 식민지 불교」, 『근대한국불교사론』, 민족사, 82쪽.

또 1910년 8월 조선이 일본에 강제 합병되고, 10월에 일본의 특정 종파인 조동종에 조선 불교 전체를 부속하려는 불교계 한일합병이라 할 수 있는 ‘원종과 조동종의 맹약’이 이회광에 의해 주도된다. 이 사실이 12월 통도사 스님에 의해 처음 폭로된다. 종파를 팔고 조상을 거꾸로 만드는 ‘매종역조(賣宗易祖)’로 인식하고, 만해 한용운을 비롯한 박한영 등 스님들이 이회광 일파에 반대하는 임제종 운동을 전개했다. 운동은 범어사와 통도사로 확대됐다. 임제종 운동은 일본 불교에 대한 불교 독립운동이었다. 임제종 운동은 승려들을 각성시키고 훗날 3.1만세운동의 불교계 동력이 됐다.

이 두 사건을 보더라도 1910년대 통도사 젊은 스님들은 불보사찰인 통도사에 자부심을 가지고 반일적 불교 자주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 통도사는 1911년 사찰령에 따라 친일적 경향을 띠며 착실히 근대 사찰로 변모하고 있었다. 사찰령 반포로 사찰 사무 질서가 잡히고, 재산 보호가 엄밀해지고, 또한 종교 선택의 자유가 생겨 강학과 포교가 가능해졌다. 그래서 불교계에서는 일본에 대해 긍정적 시각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 모든 사찰의 폐합ㆍ이전이나, 기타 일체 사찰 기물에 이르기까지 총독 허가가 아니면 건드릴 수가 없도록 강제하는 법령이 사찰령이었다. 1911년 7월 8일, 사찰령 시행규칙(寺刹令 施行規則) 8개조를 발표해 30본산(三十本山)을 만든 후, ‘본산 주지는 총독, 말사(末寺) 주지는 도장관(道長官)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 등을 강제해 조선 불교의 자주권을 제한했다.

1916년 7월 통도사는 조선 초대 총독을 지닌 데라우치가 일본에서 원수부(元帥府) 칭호를 받자 김구하 주지 이하 300여명의 승려가 금강계단 보탑전에 분향하고 일제히 만세를 같이 합창하는 축하식을 거행했다.-매일신보, 1916년 7월 2일

또 김구하 주지 스님은 일본에 시찰단-매일신보, 1917년 9월 6일 김구하, 강대련, 나창호, 곽법경, 이지영, 김상숙, 권상로 등 이 불교시찰단으로 참가한다. 당시 대표였던 구하 스님은 총리 데라우치에게 은제 향로를 선물로 준다. 돌아와서 이완용 백작 등의 환영회 대접을 받는다.(매일신보, 1917년 9월 28일)-으로 가면서 동경, 궁성을 들러보고 또 일본 불교 사찰과 대학 등을 방문해 일본의 선진화한 모습을 보며 조선의 낙후성에 한탄했다. 양건식은 시찰 축하를 하며, 시찰단원들을 “자신을 잊고 쇠퇴한 불교를 만회하고자 밤낮으로 노력을 다하는 선각자”였다고 했다.-조선불교총보(朝鮮敎叢報), 7호- 유학생들에게 구하 스님은 “바다 건너 고향에 돌아가면 조선 반도의 풍속을 개량할 지다”-조선불교총보(朝鮮敎叢報), 6호, ‘오교청년학생제국(吾敎靑年學生諸君)의게’(김구하)-하고 당부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일본에 대한 항일의식이 나이든 스님들에게는 적은 편이었다. 그만큼 조선시대에 불교는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일본 문물의 우수성을 인식시키고 식민지 지배의 협력자, 동조자를 육성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일본은 이를 충분히 달성했다.

3.1운동 당시 불교계는 사찰령과 30본산연합사무소 활동으로 인해 일제에 대한 항일의식은 거의 소멸한 상태였다. 당시 노장 스님들은 불교 활성화를 위해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겼으며, 선진지 견학으로 일본 방문을 통해 일본에 대해 긍정적인 의식을 갖고 있었다. 1919년 6월 조선헌병대 헌병대장은 경무부장 회의석상에서 “불교측은 중앙학림 교사 한용운, 백용성이 천도교와 내통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했고 그들과 친교가 있는 자와 그들의 궤변에 말려든 소수의 승려와 중앙학림 생도 일부만이 운동에 참여했다. 따라서 30본산사무소 최고 간부들은 전혀 관계가 없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獨立運動史資料集󰡕 제6집, 1984, pp.595~596-고 보고한다.

하지만 통도사 학생과 청년 승려들은 일제의 무단통치나 왜색 불교 침입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통도사 명신학교 교사로 있던 일본인이 통도사를 정토종에 부속하려고 해 그를 해고 한 적이 있다.-대한매일신보, 1910년 8월 26일- 조선총독부 권유로 설립된 중앙학림(1915~1922) 스님들은 한용운 등 선진적 강사의 영향으로 친일이 아닌 항일의 길을 걸었다. 3.1운동을 비롯해 1920년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돼 불교계 항일운동의 산실이 됐다. 통도사에서 서울로 유학한 중앙학림 오택언, 중앙학교 박민오 등이 그 대표적인 학생이었다.

외적으로 친일 경향의 행동을 한 통도사 주지 구하 스님은 내적으로는 은밀하게 독립운동 자금 1만3천원을 전달했다. 나중에 통도사에 개인 명의의 김해, 양산의 땅 6천500평을 처분해 변상하기도 했다. 안창호, 백최승(초월), 이종옥, 정인섭, 오리산(성월), 장재륜, 신정흔, 김포광, 정탁, 양만우(대응) 등이 지원받은 사람들이다. 안창호에게 5천원, 백초월은 2천원이었고, 통도사 김포광에게 300원, 양대응(만우)에게 100원을 주기도 했다. 그는 사찰령에 의해 본산 주지에게 준 경제적 재량권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 했던 것이다.

표면상으로 통도사는 친일 경향을 띠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 항일(抗日), 반일(反日) 경향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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