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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서울 3.1만세운동과 한용운 그리고 통도사..
기획/특집

서울 3.1만세운동과 한용운 그리고 통도사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9/04/30 10:54 수정 2019.04.30 10:54

■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

올해는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양산에서도 10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9일 신평 하북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이에 앞서 지난 8일 (사)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주관 ‘하북 신평 만세운동 100주년 학술대회’가 열렸다. 동부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신평 만세운동을 조명한 첫 번째 학술대회로, 학계와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가운데 향토사학자 이병길 씨가 발제한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의 내용을 정리해 보도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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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탑골(파고다)공원에 학생과 시민 5천여명이 모였다. 단상에 올라선 한 청년이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라며 독립선언서를 처음 낭독했다. 5천여명의 사람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종로로 뛰어나갔다. 이렇게 서울에서 시작한 독립만세운동은 2일 개성, 3일 예산 등에 이어서 마침내 양산에까지 파급됐다. 통도사 아래 신평장터에서 3월 13일 경남도 최초로 독립선언이 낭독되고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만세운동의 배경에 만해 한용운과 통도사 스님이 있었다.

만해 한용운은 불교계 대표로 백용성과 함께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주도하면서, 불교계 독립선언서 배포를 담당했다. 1918년부터 중앙학림 강사로 재직하고 있었던 만해는 1919년 2월 28에 이종일로부터 1만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수받는다. 그날 밤 만해는 계동(桂洞) 자신의 집인 유심사(唯心社)로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 양산시민신문


1919년 2월 28일 밤 10시에 모인 학생들은 신상완(申尙玩), 김상헌(金祥憲), 김대용(金大鎔), 백성욱(白性郁, 白聖郁), 정병헌(鄭秉憲), 김호원(金浩元), 김규현(金圭鉉), 김남신(金南信), 오택언(吳澤彦), 김봉신(金奉信), 김법린(金法麟), 박민오(朴玟悟) 등이었다. 오택언의 법정 진술에 따른 명단은 신상완(申尙玩), 김상헌(金祥憲), 김대용(金大鎔), 백성욱(白性郁, 白聖郁), 정병헌(鄭秉憲), 김호원(金浩元), 김규현(金圭鉉), 김남신(金南信), 오택언(吳澤彦) 등 9명이다. 김법린에 따르면 이날 회동에 모인 사람은 불교중앙학림(현 동국대학교) 학생 신상완(申尙玩), 백성욱(白性郁), 김상헌(金祥憲), 정병헌(鄭秉憲), 김대용(金大錯), 오택언(吳澤彥), 김봉신(金奉信), 김법린(金法麟)과 중앙학교(현 중앙고) 박민오(朴玫悟) 등 9명이었다.

공통 인물은 신상완, 김상헌, 김대용, 백성욱, 정병헌, 오택언 6명이다. 오택언 증언에는 김호원, 김규현, 김남신이 있고, 김법린 증언에는 김봉신, 김법린, 박민오가 있다. 각각 3명이 차이가 난다.

오택언은 법정 진술이지만 김법린은 아니다. 오택언이 진술하지 않은 사람은 훗날 불교계 항일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진술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특히 통도사 승려 출신 박민오가 그러하다.

‘유심사’는 3.1독립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 한용운을 중심으로 혁신적인 불교 청년들이 모여 불교계 혁신과 민족독립운동을 담론하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만해가 부른 학생 가운데 통도사 스님 출신으로 중앙학림 오택언과 중앙학교 박민오가 있었다. 이들 모두 통도사 명신학교와 지방학림 출신이었다. 한용운 스님은 1912년 통도사에 있던 해인사 팔만대장경 경전-만해 스님이 본 대장경은 용악 스님 서원으로 인쇄된 것이다. 용악(聳岳) 스님(1830~1908)은 조선 말기 스님으로,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釋王寺)에서 오랫동안 경전을 연구했으며, 금강경(金剛經)을 십여년 동안 10만번 이상 독송해 치아에서 사리(舍利)가 나왔다 한다. 스님은 말년(1896)에는 양산 통도사에 계시다가 해인사 팔만대장경 인쇄를 서원했는데 명성황후 등의 시주로 간행하게 됐다.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등에 배부됐다. 1908년 2월 15일, 79세로 입적했다. 그런데 그 팔만대장경 소재를 현재 알 수 없다-을 열람하고 대중화하기 위해 ‘불교대전’ 편찬을 계획하며 통도사에 있었다. 극락암 경봉 스님은 1912년 불교전문강원에서 만해 스님으로부터 ‘화경경’을 배웠다. 또 1913년 5월 19일 통도사 불교학림 강사에 취임했는데 제일 무서운 강사로 통했다. 1914년 4월 30일 범어사에서 ‘불교대전’을 발행했다. 또 만해 스님은 1940년부터 ‘통도사 사적’ 편찬을 위해 1941년에 안양암에 주석했으나 사적은 완성하지 못했다. 이처럼 만해 스님은 통도사와 인연이 깊었다. 그래서 통도사 학교 출신인 오택언과 박민오를 잘 알고 있었다.-오택언 자료는 ‘보안법 위반사건에 관한 1919년 3월 14일 경무총감부 검사의 오택언 신문조서’, ‘출판법ㆍ보안법 위반사건에 관한 6월 26일 경성지방법원 오택언 신문조서’를 참조했다.

만해 스님은 스무 살 전후 청년들에게 “내일 탑골공원에서 조선 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을 하기로 했다. 밤새 시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운동에 동참하라”면서 “서울 시위 후에는 각자 연고가 있는 지역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확산시키라”고 당부했다.

만해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은 중앙학림 학생들은 사태가 시급함을 느끼고, 인사동에 있던 범어사 포교당으로 자리를 옮겨 긴급회의를 해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협의했다. 학생들은 가장 연장자인 신상완을 총참모격으로 추대했고, 백성욱과 박민오는 참모격으로 중앙에 남아서 연락책을 겸해 진두지휘하게 했다. 나머지는 각자 연고가 있는 지역 사찰로 내려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결의했다.

↑↑ 만해 한용운에 대한 일제의 감시대상 인물카드
ⓒ 양산시민신문


오택언에 따르면 9명의 학생이 3천매를 가지고 갈 수가 없어 손수레에 싣고 가지고 갔다. 정동헌(鄭東憲)이 전부 가지고 갔으므로 어떠한 방법으로 어떻게 학생들에게 배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앙학림 기숙사에 생활했던 오택언은 기숙사로 100매 정도 별도로 가지고 갔다. 4장은 우편으로 양산군 통도사에 있는 신구담(辛九潭), 신화수(申華秀) 2인에게 우송했다.

서울시내를 담당한 학생들은 3월 1일 새벽 3시에 각각 회의장을 떠나 시내 포교당과 서울 근교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오택언은 3월 1일 오후 2시께 파고다공원에서 수만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 대한문 앞으로 나갔다. 파고다공원에서부터 종로통(鍾路通)으로 나와서 대한문 앞까지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돌아다녔다. 선언서를 배부하고 또는 독립만세를 부른 것은 조선독립을 희망하고 정치 변혁을 목적으로 해 행한 것이다. 그날 밤에 학교 학생과 수명이 함께 종로 북쪽 청진동 기타 많은 인가에 그 선언서를 배부해 다중을 선동했다.

지방을 담당한 학생들은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독립선언서를 간직하고 제각기 지방 사찰로 향해 지역별 만세운동을 지도했다. 김법린과 김상헌은 동래 범어사를 책임지고, 오택언은 양산 통도사를, 김봉신은 합천 해인사를, 김대용은 대구 동화사를, 정병헌은 화엄사를 중심으로 전라도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해 나갔다.-만세운동이 일어난 사찰은 범어사(부산 동래 3월 7일(또는 8일). 석왕사(함남 안변 3월 9~11일, 거사 실패), 통도사(경남 양산 3월 13일), 동화사(대구 3월 30일), 해인사(경남 합천 3월 31일), 봉선사(경기 광주 3월 31일). 신륵사(경기 여주 4월 3일), 표충사(경남 밀양 단장 4월 4일), 김룡사(경북 4월 13일) 등이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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