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은 경남 최초 만세운동인가?..
기획/특집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은 경남 최초 만세운동인가?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9/05/21 09:21 수정 2019.05.21 09:21

■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

올해는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양산에서도 10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9일 신평 하북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이에 앞서 지난 8일 (사)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주관 ‘하북 신평 만세운동 100주년 학술대회’가 열렸다. 동부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신평 만세운동을 조명한 첫 번째 학술대회로, 학계와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가운데 향토사학자 이병길 씨가 발제한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의 내용을 정리해 보도한다.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부산ㆍ경남지방에는 3월 3일 부산과 마산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서울의 시위 소식이 전해졌다. 부산에서는 3월 7일(8일) 범어사에서, 3월 11일 일신여학교 학생과 기독교도들이, 3월 13일에는 동래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 지난 3월 9일 열린 신평 만세운동 재현행사
ⓒ 양산시민신문


경남에서는 3월 13일 창녕과 밀양에서 처음 시작했다. 3월 14일에는 의령, 17일에는 함안, 18일에는 합천ㆍ진주ㆍ통영ㆍ하동 등지로 확산했고, 창원ㆍ양산ㆍ김해에서는 3월 하순, 울산ㆍ남해에서는 4월 상순에 가서야 비로소 시위가 일어났다. 이처럼 경남지역 운동은 도내 21개 부ㆍ군에 걸쳐 매우 완만하면서도 꾸준히 퍼져나갔다. 이러한 시위 열기는 3월 18, 19일과 4월 2, 3, 4일께 절정에 달했다가 4월 중순 이후 일제의 병력증강 배치로 탄압 강도가 더해지면서 가라앉기 시작했으며, 4월 말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종결됐다.-강대민, 「범어사의 3.1운동 재조명」(『大覺思想 제14집』), 62~63쪽

그러면 과연 신평장터 만세사건은 정말 3월 13일 일어났는가? 그것을 입증할 객관적 증거는 없다. 가장 널리 알려진 유일한 증언은 신평 주민 김달우(1905년 12월 9일생)의 목격담이다. “그는 당시 시장 북쪽 순지리 629번지에서 살았는데, 만세사건 당일 줄다리기를 구경하기 위해 심상소학교 마당에 있었다. 현 신평시장 동편 구 도로에 짚으로 만든 밧줄을 놓고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붉은 띠 모자를 쓴 사람이 따라가는 장면을 얼핏 기억해 내며 증언했다”(2002년 9월 23일 양산향토사연구회 유득원ㆍ정진화ㆍ조국영 취재)-양산향토사연구회, 『양산항일독립운동사』, 2009, 80쪽.

일제 조선헌병사령부는 3월 29일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독립운동사와 독립유공자 공훈록도 이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지방 독립운동사 기록에는 3월 13일 신평장날에 신평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먼저, 신평 만세운동이 장날에 일어났는가를 검토해보자. 신평시장(新坪市場)은 매달 3, 8일(월 6회) 개시-京城商工會議所, <朝鮮に於ける市場取引の現況>≪朝鮮經濟雜誌≫165, 1929년 9월-하는 오일장이다. 양산읍 시장은 1, 6일이 장날이다. 양산읍 만세운동 1차는 장날인 3월 27일(음 2월 26일), 2차는 4월 1일(음 3월 1일)에 일어났다. 모두 장날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런데 3월 13일은 음력으로 2월 12일이고, 음력 3월 13일은 양력 4월 13일이다. 그런데 일제의 3월 29일은 음력으로 2월 28일이기에 신평장날이다. 이렇게 보면 일제 기록이 옳다고 할 수 있다.

3월 13일이 장날이라고 하는 것에 몇 가지 가능성이 있다. 음력과 양력-양력 사용은 1895년 을미개혁 때 시작했다-변환에 따른 오류 가능성이다.

첫째, 음력 2월 13일 장날에 일어난 사건인데 단순 변환해 3월 13일이라고 기록했을 수 있다. 실제 음력 2월 13일은 양력 3월 14일이다.

둘째, 음력 3월 13일 장날에 일어난 사건인데, 그냥 3월 13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음력 3월 13일은 양력 4월 13일이다. 기록자들이 신평장날인 3, 8일 장이기에 음력 변환 오류를 범해 음력 2월 13일이나 3월 13일을 양력 3월 13일을 신평장날이라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음력 3월 13일인 4월 13일일 가능성은 작다. 다음에 보겠지만 3월 20일 이후 만세운동이 통도사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작기 때문이다.

만세운동 유일한 목격담 증언자인 김달우(1905년생)는 ‘장날’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증언 모두를 기록하지 않아 전후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장날이라고 하지 않고, ‘줄다리기를 한 날’로 기억하고 있다.

일단 양력 3월 13일은 신평장날은 아니다. 만약 이 날짜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면 장날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김달우의 증언처럼 ‘줄다리기하는 날’에 일어났다. 즉 ‘장날 같은 줄다리기하는 날’에 일어난 셈이다. 사람이 많이 모였기에 장날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일제 기록처럼 3월 29일(음 2월 28일)에 만세운동이 일어났을까? 하지만 3월 20일 이후에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작다.

첫째, 서울에서 독립만세 운동 소식을 가지고 온 오택언은 신평에서 3월 7일 검거돼 서울로 압송됐다. 만약 검거돼 헌병 경찰 심문으로 3~4일 만에 오택언이 자백하면 만세운동 모의는 들통나고 주모자들은 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3월 10일까지 일어나지 않았기에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또 오택언이 신화수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우편 발송한 사실의 진술 시기에 따라 경찰이 통도사를 급습해 신화수를 체포할 수 있었다. 시일을 끈다는 것은 통도사 스님들에게는 불안한 일이기에 3월 20일을 넘을 수는 없다. 음력 2월 13일(양력 3월 14일), 18일(양력 19일), 음 23일(양력 24일) 등 세 번의 장날이 있었다. 두 번의 장날을 넘기고 28일 장날(양력 29일)에 만세운동을 했을 가능성은 작다. 특히, 3월 14일부터 오택언의 재판이 진행됐기에 만세운동 주범에 대한 검거는 그 이전에 가능했는데, 통도사로 경찰이 파견돼 조사한 일이 현재는 없다. 다만 독립선언서 수취인인 신화수를 수배했지만 도피했을 가능성은 있다. 따라서 적어도 3월 18일 이전에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둘째, 통도사 스님 50여명이 3월 20일 밀양군 단장면 표충사로 가서 독립운동을 모의했다는 기록이다.-『독립운동사 제3권』, 삼일운동사(하), 225쪽. 『밀양의 독립운동사』와 한상길(『한국불교학 제88집, 2018)』, 「통도사와 표충사의 3.1운동」, 231쪽)은 5명이라고 한다-통도사 스님이 만세운동을 신평에서 하지 않고 산을 넘어 밀양 표충사로 갈 이유는 없다. 3월 20일에 갈 수 있었던 것은 3월 13일 독립만세운동을 했지만 일제 헌병 경찰의 검거를 모두 피했기 때문이다. 표충사 스님이 주도로 한-태룡리장터 만세운동은 표충사 이장옥(李章玉), 이찰수(李刹修), 오학성(吳學成), 김성흡(金性洽), 구연운(具蓮耘), 오응석(吳應石) 스님 등이 주도했다-만세운동이 1919년 4월 4일 경남 밀양군(지금의 밀양시) 단장면 태룡리, 단장면 태룡장이 서는 날에 있었다. 독립선언서는 윤준호가 통도사로부터 가져갔다.-「이장옥 고등법원 판결문」, 1920년 2월 5일-일본 헌병은 통도사를 임검해 표충사 승려 만세운동과 관련한 유력한 증거를 압수했다.-매일신보, 1919년 4월 22일 통도사에 임검, 유력한 증거물 압수-일제 기록과 같이 3월 29일 신평 만세운동을 하기 전에 통도사 스님이 3월 20일 밀양에 가서 표충사 승려에게 만세운동 모의할 가능성은 대단히 적다.

셋째, 일제 헌병사령부는 “3월 31일 합천군 해인사 만세운동이 양산군 통도사가 먼저 이 운동을 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행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통도사에서 3월 29일 시위가 일어나서 3월 31일 해인사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통도사에서 해인사까지 1919년 당시 교통편으로 이틀 안에 가기도 힘들뿐더러 설상 갔다고 하더라도 해인사 스님들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만세운동을 하기 또한 힘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일제가 기록한 3월 29일은 틀렸다고 할 수 있으며, 오히려 당시 상황을 감안한다면 지역민이 증언하는 3월 13일을 만세운동을 한 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해인사의 3월 31일, 표충사의 4월 4일 만세운동과 연관성을 따져봐도 3월 29일은 무리이며, 오히려 장날 전날인 3월 13일 만세운동이 일어나 당시 일제의 눈을 속였다고 할 수 있다. 기록이 없다고 해도 마을 주민의 기억이 더 정확할 수 있음도 알아야 한다. 물론 앞으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한다.<다음 호에 계속>

정리_홍성현 기자 redcastle@ysnews.co.kr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