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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 주역들의 삶..
기획/특집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 주역들의 삶

양산시민신문 기자 mail@ysnews.co.kr 입력 2019/06/25 10:02 수정 2019.06.25 10:02

■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

올해는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양산에서도 10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9일 신평 하북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이에 앞서 지난 8일 (사)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주관 ‘하북 신평 만세운동 100주년 학술대회’가 열렸다. 동부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신평 만세운동을 조명한 첫 번째 학술대회로, 학계와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가운데 향토사학자 이병길 씨가 발제한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의 내용을 정리해 보도한다. 편집자 주

ⓒ 양산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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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오(朴玟悟, 치오致悟, 노영魯英, 1897/99~1976)

<지난 호에 이어> 1919월 6월 초부터 1919년 10월 28일까지 박민오는 ‘자유신종보’(1호~16호?)를 제작ㆍ배포한다. 취지는 “조선인은 조선 독립운동에 찬동하고, 상호협력해 조선 독립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앙학교 졸업생 유기원, 재학생 최석인, 배재고보 3학년 박세영과 송영은 매회 4~50매를 임낙빈 집에서 등사해 배포했다. 1919년 9월에는 중국요리점 ‘대관원’에서 서승해, 임우식, 이춘학, 김도영, 박민오가 모여 독립군 자금 모집활동을 결의하고 김민오, 김봉신이 모집한 2천원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혁신공보’를 발행했으나 자금난에 봉착했다. 1919년 9월, 임봉순, 박민오, 김봉신 그리고 74세의 남작 김가진 대한제국 대신-갑오개혁 독립협회 창설, 1919년 의친왕 망명을 기도한 대동단 총재, 상해 임시정부 참여-은 일경의 감시, 추적, 경제적 곤란 등으로 상해로 밀항한다. 박민오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혁신공보’, ‘독립신문’, ‘신대한’을 경성에 있는 류연수(21), 김영선(26, 과자상), 이임창(18, 경성고보 생도), 김용인(29, 잡화상) 등에게 발송했다. 류연수를 제외하고 3명은 1920년 2월 체포된다.-1920년 2월 13일 高警 第3728號 ㊙ 不隱印刷物配布者及獨立運動資金募集者檢擧の件(고경 제3728호 비밀불은 인쇄물 배포자 및 독립운동 자금 모집자 검수건)

1919년 9월, 박민오는 경성 탑골공원에서 김봉길을 만나 “대동단에서 10월 1일 경의선, 경원선, 경부선 세 구역으로 나눠 제2독립운동을 시작할 터이니 경부선 선동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김봉길은 승낙한다. 이 사건에는 양산 출신 김봉길(25, 자동차 운전수, 경남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김덕봉(24, 잡화상, 경남 양산군 양산면 남부리 299), 서상건(23, 포목상, 경남 양산군 양산면 남부리 300)이 연루된다. 박민오, 김봉길, 김덕봉에게 직접 연락한 점으로 봐서 이들은 통도사와 모종의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덕봉과 김봉길은 징역 1년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박민오(치오)는 미국으로 가는 중이었기에 소재불명이었다.

1920년 4월, 승려 신상완이 종로경찰서에 체포된다. 상해 임시정부에 가담해 승려 이종욱, 백성욱 등과 한국 불교도를 대표해 독립운동에 분주하던 중이었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의 지령으로 국내 승려를 규합해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하고, 또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유력한 승려인 해인사 주지 이회광을 상해로 보내려던 기획이 탄로 나 체포됐다. 신상완(30, 용주사), 김상헌(28, 범어사), 김태흡(30, 석왕사)이 체포되고, 백초월(42, 영원사), 이종욱(38, 월정사), 백성욱(26, 봉국사), 김봉신(26, 해인사), 김법린(22, 범어사), 박민오(24, 통도사), 김대용(22, 고운사), 강대여(30. 철원대서업), 조윤여(43, 목사)는 체포되지 않는다.-朝鮮獨立運動 第1卷 分冊 朝鮮國內に於ける民族主義運動(조선 독립운동 제1권 분책 조선 내 민족주의운동)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공부를 더하고자 한다. 1919년 10월 남경 금릉대학에, 다시 상해를 거쳐 1920년 유럽으로 향한다. 그 후 7월 대서양 횡단해 마침내 1921년 뉴욕항에 도착한다.

1921년 감리교 계통의 ‘메소시스트 에피스코팔 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가 동양에 파송하는 선교사 양성 학교에 입학해 기숙사 생활과 선교사 교육을 받는다. 5월에 ‘미국(美國)의 (부)富를 소개(紹介)하야 본국동포(本國同胞)의 각성(覺醒)을 촉(促)함’이라는 글을 개벽 제11호(1921년 5월 1일)에 게재한다. 이런 와중에 제2차 독립선언운동을 진주에서 모의한 사실이 드러나 김두현 외 13명이 경남도 경찰부와 진주경찰서 합동수사대에 체포되지만 박치오(朴致悟, 玟悟, 26, 승려, 경남 양산군 통도사)는 소재불명으로 체포되지 않고, 신화수는 ‘육혈포 사건’으로 당시 복역 중이었다. 1921년 6월에는 ‘불교청년(佛敎靑年)에게 바라노라’는 글을 동아일보에 2회 게재한다.-동아일보, 1921년 6월 3일
1921년 7월, 개벽 제12ㆍ13호에 ‘미국학생의 자립성-재미국 박노영(朴魯英)’을 발표한다.-개벽 제12ㆍ13호, 1921년 6~7월)

1922년, 여름 방학 때 대학 진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중국 차와 향을 판매하는 생활을 한다. 1923년, 인디애나주 에반스빌 대학에 진학하고, 4월에 ‘재미 조선 학생의 미국 각지 순회강연’을 게재한다. 이때 박노영이 ‘혁신공보(革新公報)’ 발행자로 현재 미국 에반스빌 대학생임을 밝힌다.-동아일보, 1923년 4월 17일

1925년, 미국에서 유명한 ‘해리스 폴리티컬 소사이어티(Harris Political Society)’ 영어 수필 대회에 원고를 투고해 동양인으로 드물게 대상을 받는다. 클리블랜드 케이스웨스턴 대학으로 이동해 역사와 정치학을 공부하고, 공부를 마치고 미네소타 대학으로 옮겨서 계속해서 정치학과 국제관계학을 공부한다, 1927년, 미네소타대학-미네소타대학에 소개된 박노영, 1899년 랴오닝에서 태어났다. 1927년 미네소타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26년에 존 S. 필스 베리 상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하버드에서 1930년 정치학 석사와 1932년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새로운 중국 만들기(Making a New China)’, ‘미국 문명의 동양적 전망(An Oriental View of American Civilization)’, ‘서양 철수 : 동아시아에서의 백인의 모험(Retreat of the West: the White Man’s Adventure in Eastern Asia)’, ‘중국인의 기회(Chinaman’s Chance)’ 등 저서를 완성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근무한 박 대표는 미네소타대학으로 돌아와 코스를 가르치거나 중국 정치와 관련한 강연을 했다. 그는 미네소타대학 사회봉사 부문 후원으로 다양한 연설 여행을 했다. 황인규(‘중앙학교 박민오의 독립운동’, ‘대각사상 제30집, 2018년 12월’)는 생몰연대를 1897~1976년으로 보고 있지만,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사이트에는 1899~1976년으로 중국 출신으로 보고 있다. 그의 자서전인 ‘중국인의 기회’ 내용은 ‘미주현대불교’(2017년 11ㆍ12월호) ‘초기 미국 이민자 박노영 박사 자서전’(송광섭) 참조했다.-에서 예술학사 학위 취득했다. 1930년 하와이 ‘범태평양 청년불교도대회’ 한국 조선불교 선교 양종 교무원 대표로 도진호와 김태흡, 미국 거주 박노영이 참가한다. 1930년 하버드대학에 입학하고, 1932년 ‘미국 문명에 대한 동양의 전망’이라는 논문으로 한국인 최초로 하버드대학 정치관계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그 후 경제적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 대공황 시기에 강의 여행을 한다. 그 후 웨스턴리저브대학에 강의직을 맡아 강의하고, 잠시 중국에 갔지만 체포 위험으로 다시 미국에 갔다. 그 후 자서전 격인 ‘중국인의 기회(Chinaman’s Chance), 1943년’을 저술하고, 미국에서 중국 관련 강의를 하며 생활했다. 그는 “미국은 사업을 그들의 삶으로 만들고, 정치는 농담으로 만든다”고 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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