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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대식 양산시 문화관광해설사 |
ⓒ 양산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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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 왜구’라는 말이 심심찮게 뉴스를 장식한다. 쳐다보기도 싫은 정치판에서 나온 말이지만 중세 한일 관계를 공부하는 내게는 이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복합어든, 신조어든 만들어 쓸 때는 그 말의 원래 뜻을 잘 살려야 할 것이다. 물론 원래 뜻과는 다소 또는 전혀 다르게 그 시대의 정치적ㆍ사회적 의미가 덧씌워져서 통용되다가 그대로 고착되기도 하지만 그런 말이라도 역사ㆍ학문적인 용어로서 본디 뜻은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왜구의 사전적 의미는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우리나라 연안을 무대로 약탈을 일삼던 일본 해적’이다.(표준국어대사전) 왜구 연구의 국제적인 권위자인 방송대 이영 교수는 좀 더 구체적으로 ‘영토에 대한 욕심이 없으며 또한 정치ㆍ외교적인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경제적인 재원의 약탈이나 사람의 납치를 목적으로 한 일본인으로 구성된 무장집단 내지는 그 행위’라고 정의했다. 이에 따르면 삼국시대 한반도에서 왜의 활동, 임진왜란 때 왜군 등은 왜구의 범위에서 일단 제외된다.
1223년 ‘왜가 금주(김해)를 침구하다’(倭寇金州)라는 기사로 ‘고려사’에 처음 등장한 왜구는 이후 약 400년 동안 동아시아 국제 관계, 특히 한ㆍ중ㆍ일 3국의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역사 현상이다. 특히 1350년부터 조선 건국 때까지 약 40년간 이른바 ‘경인년 이후의 왜구’는 무려 300여회나 침구(많은 해에는 32회)해왕조 교체의 큰 원인이 되기도 했다.
왜구의 침구는 조운선을 비롯한 물자 약탈, 살인과 납치, 방화와 파괴 등 직접 피해도 컸지만, 더 심각한 것은 왜구를 피해 백성들을 내륙으로 40리, 70리 안으로 이주시킴으로써 경작 포기와 유망→기근과 아사→농업인구 감소→농업생산 감소→국가 조세수입 감소→재정 고갈→국가 기능 마비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시작점이었다는 것이다. 왜구 방어를 위한 무리한 병사 징발과 축성 인력 동원으로 민생은 더욱 피폐해져 민심이 이반하고, 왜구 토벌로 권력과 신망을 키운 이성계 등 무인 세력 득세로 고려는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황산강(낙동강)을 통한 왜구 침입도 빈번했는데 강 초입에 위치한 양산은 지리ㆍ군사적인 요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려시대에는 방어사를 두어 왜구를 물리치게 했는데, 왜구가 극성을 부릴 때는 한때 읍치를 폐쇄하고 속현인 동평현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고려사’에는 이 시기 왜구의 침구 기사가 수없이 나오며 양산 침구 기사도 적지 않다. 다만 우리 양산의 삼조의열 가운데 한 분으로 현창하고 있는 김원현 양주방어사의 왜구 격퇴에 대해서는 사료에 언급이 없다는 것이 매우 아쉬운데 이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고려 말 왜구는 일본의 남북조내란기 규슈(九州)지역 군사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구의 침구 목적은 전투에 필요한 병량미와 노동력 확보였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왜구는 계속해서 침구,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이 단행되기도 하지만 왜구는 사실상 1380년대를 정점으로 규모도 작아지고 침구 빈도도 줄어들게 된다.
왜구가 진정돼 가는 이유로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군사 응징과 외교 노력을 들 수 있다. 즉 최영과 이성계 등의 왜구 대파, 정지와 최무선 등이 중심이 된 수군 재건과 화포 개발, 거기에 정몽주 등의 적극적인 외교적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때마침 60년을 끌어온 일본의 남북조내란도 종식되어 중앙 권력의 지방 통제력이 회복된 것과 조선 정부 회유정책도 큰 효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왜구의 분류라든지 발생원인, 활동 범위 등 미진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한반도를 침구한 왜구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이 된 것 같다. 왜구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든지, 어떻게 조합해서 쓰든지 그것은 독자들이 잘 알아서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