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고초 끝에 22세에 큰 상처를 안고 귀향했다. 하지만 개인의 삶이 폭력의 역사 속에 묻히도록 국가가 사회가 우리가 침묵한 가운데, 할머니는 그렇게 40년을 묵묵히 참고 견뎌내야 했다.
그러다 1992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본격적인 인권운동의 길을 걸었다. 같은 해 8월 제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에서 위안부 피해를 증언했다. 또 1993년 오스트리아 빈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해 같은 증언을 하는 등 김 할머니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고발했다.
2012년부터는 유엔인권이사회와 미국, 영국, 독일, 노르웨이, 일본 등을 방문하며 전쟁 없는 세상과 전시 성폭력 피해 재발을 막기 위한 해외 캠페인을 벌였다. 또 그 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함께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나비기금’을 설립했다.
![]() |
ⓒ 양산시민신문 |
김 할머니는 기부활동도 활발히 했다. 2015년 6월 전쟁ㆍ무력분쟁지역 아이들 장학금으로 5천만원을 기부했고, 2017년 7월 재일조선고등학교 학생 2명에게 김복동장학금을 전달했다.
같은 해 8월 사후 남은 모든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약정을 맺고, 11월 포항지진 피해자를 돕기 위해 1천만원 후원했다. 여성인권상금 5천만원도 무력분쟁지역 성폭력 피해자 지원을 위한 ‘김복동 평화상’ 제정에 사용했다.
지난해 9월에는 암 투병 중에도 외교통상부 청사 앞에서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촉구하며 1위 시위를 이어갔다.
그리고 지난 1월 28일 향년 93세 일기로 별세했다. 하지만 김 할머니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할머니 이야기를 담은 감동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을 제작, 오는 8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모두가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