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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관조(觀照)’하는 사색의 여행지, 대석(大石)마을..
기획/특집

‘관조(觀照)’하는 사색의 여행지, 대석(大石)마을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0/01/07 10:40 수정 2020.01.07 10:40
양산, 어디까지 가봤니?
공모전 대상 수상작품

최근 관광의 흐름은 미식여행과 감성카페, 골목여행, 뉴트로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다. 양산시도 이에 발맞춰 새로운 지역 관광자원을 발굴하기 위해 ‘양산! 어디까지 가봤니?’ 공모전을 진행했으며, 심시위원 평가와 온라인 투표를 거쳐 접수한 27개 작품 가운데 5개 작품을 최종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본지는 5개 수상작품을 차례로 소개한다.

↑↑ 현재의 대석마을(2019년)
ⓒ 양산시민신문

“임진왜란 당시 나주 정씨 정덕(丁德)이 어머니를 등에 업고 낙동강을 건너 피난 와서 홍룡폭포 갯들 밑에서 생활하다가 현재 마을로 내려와서 정착했다. 당시 마을 이름을 돌실이라 했고, 담양 전씨, 김해 허씨 등 3개 씨족이 와서 살았다. 그 후 김해 김씨, 영일 정씨, 밀양 박씨, 안동 권씨, 경주 최씨, 동래 정씨, 김녕 김씨 등이 입주, 마을을 형성해 오늘에 이르다” 시청 홈페이지에도, 마을 안내판에도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이 마을은 현재 120여세대, 250여명의 주민이 살는 양산시 상북면 대석마을이다. 일명 물안뜰 마을이라고도 한다. ‘물안뜰’이란 농촌진흥청에서 지원하는 농촌테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2007년부터 불리는 마을 별칭인데 오히려 외지인은 몇 년 안 된 이 이름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또는 홍룡폭포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면 더 위치를 가늠하기 쉬울 것이다.

↑↑ 대석마을 명칭 유래가 되는 큰 돌
ⓒ 양산시민신문

예전에는 마을을 관통해 산으로, 폭포로, 사찰로 향했는데 2000년대 들어 우회도로가 만들어지면서 마을을 둘러볼 겨를 없이 차를 타고 도로를 따라 스쳐 지나가는 마을이 됐다.

양산 8경 중 2경인 천성산을 뒤로하고, 골짝골짝 내려오는 물이(4경 홍룡폭포) 대석저수지를 거쳐 마을 앞을 휘감아 돌아 양산천으로 흘러내려가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으로, 그러한 자연을 닮아 온화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양산의 대표적인 전원마을, 장수마을이 대석마을이다.

1970년대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지정과 군사시설로 인한 군사보호지역, 계곡ㆍ저수지 등 수자원으로 인해 수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주변이 산막공단, 석계산단 등으로 개발을 거듭해올 때 이곳만은 유일하게 자연자원을 확보한 채 조용히 전통마을 자취를 이어오고 있다.

주민 대부분이 중노년층이라 점점 활동이 줄어 화려한 도심지와는 달리 유별나지는 않지만, 서로 음식을 나눠 먹고, 도자기 만들기, 풍물 배우기, 시니어 노래교실 등을 하며 주민이 서로 단합하고 일상 속에서 소소한 문화적 삶을 사는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이기도 하다.

↑↑ 세계인환영비
ⓒ 양산시민신문

영어의 ‘투어리즘(tourism)’은 라틴어‘tornus(돌다, 순회하다)’에서 유래해 즐거움을 위한 단기간 여행을 뜻하는 반면, 한자어 관광(觀光)은 ‘아름다운 것’, ‘훌륭한 것’, ‘자랑스러운 것’을 ‘본다’, ‘보인다’라는 의미로 단순히 가시적인 아름다움이나 맛, 멋뿐만이 아니라 내면에 숨겨진 지역의 무엇을 음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해보며, 하루가 다르게 상전벽해(桑田碧海)하는 변화의 움직임 속에서 느림과 소박함을 읽으며 여유를 느껴보는 관광은 어떨까 제안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의 알려진 관광지나 카페 등 특화된 업종 군으로 이뤄진 마을, 대단위 아파트 이름으로 불리는 마을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삶이 녹아있는 고유의 마을을 통해 지역민들의 현재 삶과 연계한 사회적 가치와 유ㆍ무형의 역사ㆍ문화ㆍ예술적 자산을 찾아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지역문화의 하나로서 소개해 본다.

유독 상북면에는 석계(삼계), 소석, 내석, 외석, 공암, 모래불, 반회 등 마을 지명이 돌과 관련한 것이 많다. 대석(大石)이라는 마을 이름처럼 큰 돌이 많은 이 마을엔 어떤 돌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있을까? 돌은 그냥 돌이 아니라 산에서 바위가 쪼개져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면서 큰 돌, 작은 돌로 나눠진 것일 테니 천성산 아래로 내려오며 골짜기 이름도 갖가지 다양하다. 가는골, 가마골, 머그밭골, 무재개골, 문방우골, 버무골, 소매골, 석량골, 연지골, 언오골, 지남석골, 지누골, 아시밭골, 갓골짝…. 이러한 골짜기 이름 속에도 그 땅의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한 우리 조상들의 사고와 농경사회 생활모습 등이 담겨 있어 귀중한 지역문화가 되는 것이다.

↑↑ 홍룡계곡에 이름 새겨진 돌
ⓒ 양산시민신문

사람이 사는 집, 골목, 길뿐만 아니라 산, 강, 바위에도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다. 이야기가 없는 돌은 그냥 돌일 뿐이지만, 이야기를 담으면 역사가 된다. 중요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있어서 더욱 높이 평가되고 매력적인 경우가 많다. 부여 낙화암 절벽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몰락해가는 백제 삼천궁녀의 애절한 이야기가 있어 더 특별한 관광지가 되는 것이다.

대석마을 입구 당산 아래에 ‘세계인환영’이라는 돌로 만든 비가 서 있다. 세계를 향한 열린 시각의 권순도라는 인물이 젊은 시절 영국인 세관장 헌트 딸과의 러브스토리를 품고 있는 석비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100여년 전, 누구도 생각 못 했을 글로벌한 안목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거기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나면 대석마을의 ‘제일강산’이란 글씨가 새겨진 돌도 ‘면암 최선생’이란 글씨가 새겨진 돌도 그냥 돌이 아니라 시대 상황이 담긴 의미체임을 알게 될 것이다.

↑↑ 당산 아래 이름 새겨진 돌
ⓒ 양산시민신문

또 당산 아래 돌(암벽)과 홍룡계곡 돌에 새겨진 갖가지 이름은 언제, 누가, 어떤 의미로 새겼을까 유추해보며 선대의 그들이 자연에서 누렸던 즐거움과 현대의 우리가 누리는 자연의 즐거움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시대 상황에 따라 하나의 자연에 대한 의미 부여의 차이점을 알아가는 즐거움도 있을 것이다.

한편, 자연물 그대로의 돌이 아니라 돌처럼 우직했던 성품의 선각자들에 얽힌 이야기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양산 출신 의병장 안근(安瑾, 1540~미상)과 안이명(安以命, 미상~미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또 그 분들 묘가 대석마을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구국(救國)을 위한 우직한 충정은 굳건한 돌과 같았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권순도(權順度, 1870~1934)라는 인물은 구한말 개화인이 되고 싶었던 양산 대석 출신 서생이다. 국경과 인종을 넘는 사랑을 하면서도 몰락 조선의 마지막 충절이었던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을 기리기 위해 홍룡계곡에 의충단을 세우고 가슴에 품었던 인물로서 사업으로 축적한 부를 고향 양산으로 돌아와 육영사업과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등 한 번 데워지면 금방 식지 않는 돌처럼 따뜻하고 소박한 삶을 이어간 인물이다.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며 현지화와 세계화를 동시에 표방한 세방화(Glocalization)의 표본적 인물이라 하겠다.

↑↑ 돌에 새겨진 제일강산
ⓒ 양산시민신문

권순도와 함께 홍룡폭포 입구에 가홍정(駕虹亭)을 세운 이재영의 둘째 아들 백농(白農) 이규홍(李圭洪, 1893~1939) 선생은 일광상회를 운영하며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조달하고 1919년 만세운동 후 윤현진 열사와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을 한 인물로 상해 임시정부에서 재무총장, 외무총장, 임시의정원 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폐결핵으로 귀국한 후 사업을 한 이력 때문에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대접받지 못하는 비운의 인물로, 큰 돌이 뒹굴어 깨어지고 조각난 모습처럼 살다간 인물이다. 그의 후손들이 사재를 털어 홍수 피해를 당하는 마을을 위해 저수지를 완공한 것이 현재 대석저수지의 전신이 된다. 후손들의 애민정신은 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돌아보면 ‘돌’이라는 자연물 하나하나에도 시대 상황과 사람 이야기를 담은 흔적이 곳곳에 깃들어 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거액을 들여 생태하천 복원 공사를 하고, 창조적 마을 만들기 사업을 하며 갖가지 지원을 통해 마을주민을 결속하기 위한 행태들이 진행됐지만, 정작 수백년을 이어온 전통마을이 ‘관광’의 가치로 그 효과를 보고 있는가? 들여다보면 간직하고 있는 수많은 자원이 있음에도 알려 하지 않았고, 들여다보지 않았고, 봐도 흘려버렸고, 알아도 모른척 하지는 않았었는가?

천성산이라는 자연자원을 갖고 있다고, 통도사라는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고 명품 관광도시가 아니다. 선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자원을 보수, 유지만 해나가는 것 또한 옳지 않다.

‘새로운 관광자원 발굴’은 기존 자원을 유지, 답습해 나가는 것만도 아니고, 기존 자원을 내팽개쳐두고 새로운 것에만 함몰된 시각 또한 아니다. 지역민이 살고 있는 주변의 소소한 생활문화 주변에서부터 하나하나 훑어 그 ‘터무니’를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할 것이며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관점에서 옛것을 제대로 알고 익히는 것을 전제해야 새로움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관광의 ‘관(觀)’을 우리말로 하면 ‘바라봄’일 것이다. ‘광(光)’은 ‘빛’, ‘아름다움’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여기에 ‘조(照)’의 의미를 더해보면 어떨까? 그저 바라보는 것인지,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인지, 다시 비추며 바라보는 것인지, 어떤 관심의 척도로 바라보는 것인지에 따라 다양하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대석마을 지명이 가진 큰(大)돌(石)의 의미를 되새기며 마을 곳곳을 돌아보자. 전통마을 한 곳에서도 다양한 자연의 이야기, 삶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관조(觀照)’하는 사색의 여행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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