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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애국지사 윤현진, 순국 99주년을 맞이하며..
오피니언

애국지사 윤현진, 순국 99주년을 맞이하며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0/09/17 10:02 수정 2020.09.17 10:02
디지털 공간에서 오류의 역사는 수정돼야 한다

↑↑ 춘추공원에 있는 윤현진 선생 흉상
ⓒ 양산시민신문
1921년 9월 17일(음력 8월 16일) 오후 2시 반, 상해 프랑스조계 천주교병원에서 만 29세의 젊은이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는 1919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자 중국 상해로 망명해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재무차장으로 활동했던 ‘윤현진’이다. 독립운동과 통일사업에 매진하던 그는 불행히 중병에 걸려 10여일을 신음하다가 서거한 후 19일 서양인 공동묘지인 정안사에 묻혔다.

윤현진의 부친은 동래부사를 지낸 윤필은이다. 청렴한 그는 백성을 편하게 다스려 큰비와 같은 은혜를 입은 동래민들은 ‘청덕선정비’를 세웠다. 윤현진은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에서 1892년 10월 17일(음력 9월 16일) 태어났다. 15세 되던 1907년 숙부 윤상은과 윤명은, 구포 객주 장우석 등이 설립한 사립 구명학교(현 구포초등학교) 1회를 졸업했다. 이 학교는 나중에 백산 안희제가 교장을 했는데, 2.8독립선언에 참여한 양산 상북면 출신 김철수도 3회, 부산대학교 초대 총장 윤인구는 4회 졸업생이다.

윤현진은 1908년 기장군수를 한 엄신영의 딸 엄정자와 결혼한다. 장인의 동생은 엄우영으로 양산 3.1운동의 주역 엄주태의 부친이다. 윤현진은 그 후 서울 배제중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그의 형 윤현태와 함께 1909년 중국 상해로 유학을 갔다. 상해에서 영어를 배우고 안창호, 김택영, 유동열, 조성환 등과 연락하고 잡지 ‘소년’의 편집에 종사하다가 여동생 윤덕경과 현정건(독립운동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했으며, 소설가 현진건의 형)의 결혼으로 1910년 귀국했다. 8월 국권피탈 이후, 그는 경제활동과 교육운동을 통해 동지를 규합하려고 노력했다.

22살 때인 1914년 일본 동경의 명치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해 유학생학우회 총무를 하며 잡지 ‘학지광’ 발간에 참여한다. 제국주의 타도와 민족해방을 표방한 ‘신아동맹당’에서 활동했다. 1916년 유학 2년 만에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해 국내에서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했다. 1909년 파평 윤씨 집안 주축으로 설립한 구포저축 주식회사는 구포은행으로, 1915년 경남은행으로 발전해 민족 자본가들의 금융창구 역할을 한다. 윤현진은 구포저축 초기 최대 주주였다. 부산의 백산무역(주)은 형 윤현태, 숙부 윤상은, 백산 안희제, 경주 최준 등이 출자한 회사로 민족 자본가들의 회사였다. 윤현태는 백산무역의 대주주였다. 두 형제가 관계한 은행과 무역회사는 민족자본의 대일 항전 기관이었다.

윤현진은 1919년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을 하다가, 4월 남형우와 함께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 수립에 힘을 쓰고 재무차장으로 활동한다. 당시 형 윤현태는 조선독립운동비로 수만엔을 임정에 제공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윤현진은 법무차장 남형우, 양산 출신 학무(외무)차장 이규홍과 함께 임시정부 차장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독립운동의 변화를 모색하는 가운데 임정의 실세 차장들은 이승만 대통령 불신임 운동을 한다. 사직서를 제출하는 등 압박하지만, 안창호의 거부로 결국 이루지 못한다. 훗날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이승만 대통령 탄핵안을 의결한다. 최초의 대통령 탄핵이었다.

당시 임정에는 실력양성론, 무장투쟁론, 외교론 등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윤현진은 재무차장으로 임정의 살림살이에 전력하면서, 여러 갈래로 갈라진 독립운동을 원만히 진행할 유일한 방법이 국민회의 회의 소집이라 보고 상해 임정 개조에 진력하기 위해 사임했다. 임정의 통일 운동에 앞장섰던 윤현진은 죽음의 문턱에 있으면서도 가장 한스럽게 생각한 것은 우리 민족에게 대단합 대단결이 결여함이었다.

↑↑ 1921년 9월 17일(음 8월 16일) 이역만리 상해에서 순국한 윤현진 선생은 만 29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임시정부 국장으로 치러진 윤 선생 장례에는 안창호, 김구, 신익희, 여운형, 김철, 최창식, 손정도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함께 애도했다. 사진은 윤 선생 장례 당시 모습.
ⓒ 양산시민신문

윤현진은 이국땅에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안창호는 그가 입원했을 때 친히 간호하고, 그의 생활비는 물론 소지품을 저장하거나 팔기도 해 2천원을 입원비로 냈다. 순국하자 장례비용도 전담해 몹시 애통해했다. 9월 19일 상해 임시정부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수많은 만장이 휘날렸고 수백명의 내빈이 참석해 선생의 죽음을 애석해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그의 죽음에 대해 “형극(荊棘)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으로 그의 사망은 임정의 패망이라고 논평했다.

선생은 마른 몸에 심약한 듯 보였지만, 강철과 같은 독립 의지로 가득했고, 언제나 상냥스러운 낯빛을 띠면서도 과묵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과단성은 남달리 날카로웠다. 평상시 우유부단할 것같이 보였지만, 일단 유사시에는 일도양단의 용기를 가진 분이었다. 하지만 혈기 왕성한 청년이 큰 뜻을 펴지 못한 채 병환으로 요절한 것은 참으로 애달픈 일이다.

비보를 들은 형 윤현태는 장례 후 도착해 한글 묘비를 세웠다. ‘사천니백니십오년구월십륙일생/ 윤 현 진 묻음/ 사천니백오십사년팔월십육일졸’이라고. 생전에 윤현진은 “독립하지 않으면 나의 유골을 고국산천에 묻지 말라”고 했다. 광복 50주년이 되는 1995년 6월 21일 유해는 국내로 봉환해 6월 23일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우리 독립운동사는 늘 새롭게 적어야 한다. 이제까지 윤현진의 구명학교 졸업 이후 명치대학교 입학까지 사료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공백으로 있었다. 윤현진에게는 생몰 연월일이 사실과 오류가 혼재하고 있다. 현재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 출생일은 9월 20일, 사망 날짜는 9월 16일로 기록하고 있다.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일부 인터넷 백과사전과 블로그, 카페, 논문에는 이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당시 독립신문이나 신한민보에도 분명하게 9월 17일(음력 8월 16일)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윤현태가 쓴 비문에는 정확한 생몰연대가 기록돼 있다. 현재 오류와 사실이 혼재된 상황이다.

1959년 4월 15일 양산의 뜻있는 분들이 양산군민 일동 명의로 양산시 교동 춘추공원에 선생의 기념비를 건립했다. 그때 통도사 경봉 스님은 ‘우산 선생 제막식’ 추도사를 적었다. “민족을 위해 보국함은 세상에서 참으로 어려운 일/ 서릿달 같은 일편단심 해외에서 헌신했네/ 비석을 세워 그 장한 뜻을 전하니/ 강가에 푸른 버들 그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네/ 가히 인품은 옥 같은 연성의 보배요/ 충성된 말은 구슬을 한 줄에 꿰인 듯/ 열사의 제단 앞에 공훈을 표상하니/ 우산 선생이 계신다면 화관을 쓰시리라”(영축산 삼소굴 원광 김경봉)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2017년 12월 18일 양산 춘추공원에 윤현진의 흉상을 설치했다. 현재 춘추공원 충렬사에는 양산 출신 독립운동가 39명이 모셔져 있다. (사)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양산지역 독립운동과 그 유공자를 기리고 알리기 위해 윤현진 의사 순국 100주년이 되는 2021년 완공을 목표로 양산 독립공원 조성과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박정수 이사장은 범시민 모금운동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후원 동참에 앞장서고 있다. 박 이사장은 “서병희 의병장, 2.8독립선언의 김철수, 상해 임정에서 활동한 윤현진과 이규홍, 양산 농민의 양산경찰서 습격을 주도한 전병건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애국충절의 고장”이라며 “시민 염원을 담은 항일독립운동기념관이 순조롭게 건립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향후 양산만이 아니라 지역의 독립운동사는 새 사료를 발굴해 연구하고 재조명해 오류를 수정해야 한다. 손가락으로 쉽게 복사 가능한 시대에 오류의 전파는 지금, 이 순간에도 퍼지고 있다. 디지털 공간에 오류가 있는 쓰레기를 청소하지 않으면 아무리 유공자의 공덕을 높이 칭송해도 빛바래질 수밖에 없다.

 
↑↑ 이병길
ⓒ 양산시민신문  
이병길: 경남 안의 출생이다.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양산 보광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시인이자 역사 문화 질문자로 살고 있다. ‘주변인과 시’, ‘주변인과 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울산민예총, 울산작가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ㆍ울산ㆍ양산지역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길을 걷다’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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