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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3] 같이 산다는 게..
오피니언

[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3] 같이 산다는 게 뭔지 알아?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1/04/02 13:39 수정 2021.04.02 13:39
윤구병 일기/ 윤구병

 
↑↑ 이기철
시인
ⓒ 양산시민신문  
기성 옷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일은 마냥 기쁜 일일까? 아님 맞춤했던 습관을 떨쳐내는 일이 버겁고 두려운 일일까? 돌이켜 보면 아득하게 느껴질 스스로 낸 길은 어떻게 다가올까? 어떤 모양이라도 용기가 필요하다.

버리고 새롭게 시작한 사람 윤구병.

강단에서 설파하던 철학을 생활 속으로 끌고 와 공동체라는 든든한 울타리를 치고, 자신도 넘어지길 수없이 반복하며 함께 사는 법을 기꺼이 나눈 이야기는 울림이 깊고 크다. 교육은 현장이 답이라는 명제는 시절이 변해도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한 뚝심 센 촌놈, 그가 사사로이 쓴 일기를 당당하게 훔쳐보았다.

땅과 사람을 섬기며 일군 ‘변산공동체학교’. 그 지난(至難)한 울력을 무시로 찾아오는 통증처럼 저릿저릿하게 읽었다. ‘제 앞가림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목숨처럼 받들었던 일상들을 과감히 버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함을 몸소 땀으로 배우고 이를 나누었다. 산과 들과 갯벌이 있는 전북 부안에서(그는 함평이 고향이다), 농사를 지으면서 대안교육이 이뤄지는 공동체 학교. 여기에서 논농사 밭농사를 짓고, 젓갈, 효소 등을 만들어 자급자족하면서 공동체란 무엇인지를 몸이 먼저 알도록 꾸짖고 있다.

↑↑ 윤구병 일기 책 표지
ⓒ 양산시민신문

그가 이런 공동체를 구상하게 된 동기는 일정 부분 야마기시회에 대한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도 언급되고 있다.

야마기시회는 1953년 일본에서 야마기시 미요조에 의해 시작됐다. 인간성 회복, 전인 행복 운동에 기초를 두고 이를 실험해보고자 ‘경향 실현지’라는 이름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가꾸고 있는 공동체다.

한마디로 ‘나, 모두와 함께 번영한다’는 정신. 이것은 평등을 전제해야 하는 일이지만 탈취나 탐탁지 않은 승낙, 강요된 희생, 반대와 저항 없이, 한 사람 남김없이 모두 풍부하게 되는, 가진 사람을 울리지 않고 빈핍(貧乏)을 기쁘게 하는 사상이다.

야마기시가 주창한 공동체 사회는 감정을 억압당하거나 직업이나 주거지를 제한하는 불평등을 제거하고 누구에게나 동일 조건과 균등 기회를 제공, 각각 개성에 적합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그 요구가 채워질 수 있는 사회가 올바른 사회라는 점을 강조한다.

철학자로서 윤구병 선생이 이 메시지를 놓쳤을 리 없다.

↑↑ 책 속 수록된 윤구병 선생 일상 사진
ⓒ 양산시민신문

간간(間間) 혹은 이따금 글을 쓰는 이에게 반성이 되는 윤 선생 일기(日記)는 띄엄띄엄한 삶을 반성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런 일상이 빼곡히 기록된 919페이지나 되는 책, ‘윤구병 일기’를 비로소 다 읽었다. ‘같이 산다는 게 뭔지 알아?’라는 부제에 대한 해답은 책을 덮으면서 비로소 이해됐다. 1996년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변산공동체 일을 꾸며 농사꾼으로 복무하기 시작하면서 적은 1년 치 일기다.

일기라는 게 그렇다. 자기반성이기도 하고 자기변명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진정성이 담보돼있는 중요한 자산이다. 개인이 쓴 내밀한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은 악취미일까 아니면 보상 심리에 해당하는 것일까? 들켜버린 일기장이 아니라 공개한 일기장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은 그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굳건한 철학을 고스란히 노출시키고 있다. 무슨 거대한 담론으로 가득 차 있는 글이 아니다. 누구나 겪는 하루 치가 산더미처럼 쌓여 그 공간을 어떻게 비집고 나아가야 하는 가를 물을 따름이다. 어쩌면 일기는 피곤한 인간관계가 전부라 할 수 있다. 또 딱히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연이, 농촌이, 농사가 반드시 사람 사는 세상 중심이라는 점을 끝까지 지키고자 한다.

때로는 고집과 고집이, 반대와 반대가 부딪쳐 피곤해도 ‘일기’를 ‘고백록’으로 여기며 눈을 간신히 붙이는 하루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경건함이 절로 일어난다.

‘일상’이 ‘일생’임을 깨닫게 하는 일기. 그 일기를 ‘읽기’ 하면서 라스트 씬만큼은 ‘해피 엔드’(Happy End)이길 기대했지만 1996년 12월 31일, 한 해 마지막 날도 법적 분쟁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문제로 머리가 아프다.

↑↑ 책 속 수록된 윤구병 선생 일상 사진
ⓒ 양산시민신문

다만, 남긴 시 한 편에서 그가 살아가는 길, 살아온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 시가 나는 ‘해피 앤드’(Happy And)로 읽혔다.

그가 남긴 일기장에는 고집쟁이 농사꾼 전우익 선생이 남긴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도 겹친다. 두 사람은 다른 듯 닮은 삶을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
사랑이 찾아오면
온몸과 마음으로 껴안아요
놓치지 말아요
이 순간 이 느낌
그래요, 바로 그거지요
사랑 속에 녹아버려요
과거도 미래도 녹여버려요
사랑이 무너지면
온 세상 함께 무너져요
기다리지 말아요
미루지도 말아요
온몸과 마음 활짝 열어
그냥 받아들여요
문밖에서 서성이게
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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