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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역사란 교육으로 주입된 사회적 기억이다..
오피니언

역사란 교육으로 주입된 사회적 기억이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1/05/04 16:22 수정 2021.05.04 16:22

 
↑↑ 서용태
인문연구공동체 로두스 대표
육군3사관학교 인문학처 강사
ⓒ 양산시민신문  
9월 1일
전라우도 의병장이 이 고을에 들어온 지 오래됐는데, 아직도 적이 있는 경계로 나가 진을 치지 않고 날마다 군관과 활쏘기나 하는 한편 녹각목(사슴뿔 모양으로 만든 나무)을 많이 가져다가 관가 앞뒤로 목책을 설치하고 적이 침입할까 걱정하며 오래 머물 생각만 하고 있으니 우습다. 먼 지역에 물러나 움츠린 채 양식만 축내고 나아가 싸울 생각을 하지 않으니 더욱 우습다. 이름만 의병일 뿐 사실은 도망쳐서 죄를 얻은 관군들이 죄다 모여 처벌이나 면하려는 수작인 셈이다.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나던 해인 1592년 음력 9월 1일 작성된 어느 일기의 한 부분이다. 오희문이 남긴 『쇄미록』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평범한 양반이 전란의 시기를 어떻게 살아남아 가문을 일으켰는지를 세밀하게 기록한 일기 글로서, 선조 24년(1591) 11월 27일부터 선조 34년(1601) 2월 27일까지 9년 3개월간, 그의 나이 53세부터 63세까지의 일기 총 7책, 1670쪽, 51만9973자가 온전하게 전해져오고 있으며, 사료적 가치가 뛰어나 1991년에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됐다.

오희문은 전쟁이 일어나자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를 떠돌며 피란생활을 이어가면서도 꾸준히 일기를 썼다. 그런데 앞의 일기 내용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의병장이나 의병의 모습과는 판이하다. 왜적과 싸우기는커녕 숨어서 일신을 보전하기 급급하다. ‘의병’은 핑계일 뿐이고, 백성의 눈에는 그저 ‘합법적 도망병’으로 보일 따름이다. 과연 오희문이 목격한 의병은 일탈한 일부의 모습일까? 그의 일기를 조금 더 보자.

9월 13일
지난번에 어떤 의병이 밤에 무주 적진으로 들어가 진영 밖 망대에서 숙직하던 왜놈을 활로 쏘고 수급을 베어와 바쳤다고 했는데, 지금 다시 들으니 베어 온 것은 왜놈의 머리가 아니라 목화를 따다가 적에게 살해돼 버려진 무주 백성의 머리였다. 머리를 베인 자의 아비는 이 고을에 사는데, 아들이 적을 따랐다고 위협을 받을까 몹시 두려워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고 한다.


의병에 참여한 누군가가 전공을 세우기 위해 조선 백성의 목을 마치 왜군의 것인 양 거짓으로 베어와 바친 사건이 기록돼 있다. 전쟁이 가져온 비극적 사건이지만, 400여년 전에 일어난 전쟁 얘기가 아니라 현대사처럼 읽힌다. 머리를 베인 사람의 부모가 자식이 적을 따랐다고 위협을 받을까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대목은 마치 한국전쟁 때 빨갱이 가족이라 지목되는 것이 두려워 억울하게 죽은 가족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던 보도연맹사건 등 민간인학살 피해자의 유가족을 보는 듯하다.

우리가 초ㆍ중ㆍ고등학교를 거치며 배우고 공부했던 역사교과서에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수많은 의병이 나온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이 모두 홍의장군 곽재우와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곽재우가 소수의 예외적인 의병의 모습이고, 오히려 오희문이 목격한 것처럼 숨어서 양식만 축내는 이름만 의병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교과서 그 어디에도 오희문의 눈에 비친, 일반 백성의 눈으로 본 거짓 의병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역사가는 오직 역사적 사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해야 한다”

19세기 이후 근대역사학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된 랑케사학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역사적 객관성과 과학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 위에서 성립됐다. 하지만 자신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말하는 근대국민국가는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국가는 자국의 과거 행동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으로 비칠 때 솔직한 자기 인식을 피하려고 한다. 한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기억이라면, 한 국가의 집단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역사다. 역사란 유전자처럼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집단적 삶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종의 사회적 기억장치이다. 그래서 각 국가는 잊고 싶거나 부끄러운 기억을 은폐하기 위해서 부정, 책임 전가, 합리화, 상대화 같은 수단을 동원하여 임의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조합해서 재구성한다.

역사란 교육으로 ‘주입된 사회적 기억’이다. 특정한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구성원들을 기억공동체로 한데 묶어 주는 ‘역사’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또 지워지면서 재구성된다. 그래서 모든 역사는 현대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위해 기억해야 하는가의 문제, 다시 말해서 어떠한 것을 역사적으로 기억해야할지를 결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임진왜란만 하더라도 우리가 받은 역사교육에는 국난극복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유성룡의 『징비록』은 있어도 『쇄미록』은 없다. 전장의 최일선에 선 군인의 입장과 막후에서 전쟁을 지휘한 정부의 입장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정작 그때를 살아간 대다수 백성의 입장은 알려주지 않는다. 그야말로 “뭣이 중헌디?”로소이다.

수많은 역사교육과 역사정책은 생성 과정에서 첨예한 논쟁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우리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일본과 중국의 그것은 더욱 첨예하다. 국사(國史)가 지극히 국가의 논리와 입장에 의해 서술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기억공동체에 의해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변화하기도 한다. 한국사 연구의 경우 종래 정치사·제도사 일색에서 1980년대 중후반부터 민중사가 주목받기 시작하고, 20세기 들어서는 생활사 연구가 부쩍 늘어났다. 다양한 분야의 역사연구가 이루어지면서 당대의 역사상을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이 몹시 반갑다. 하지만 학교교육현장에서는 여전히 정치사ㆍ제도사 위주의 역사교육이 이뤄지고 있는 듯하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에서 보았지만, 국가는 끊임없이 역사교육의 방식으로 구성원들에게 집단기억을 주입하고 통제하려 한다. 이제 독자들부터라도 ‘주입된 교과서 역사’가 아닌 ‘비판적 역사 읽기’를 통해 변화를 시도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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