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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비일상’이 오래 이어지면 ‘일상’이 된다..
오피니언

‘비일상’이 오래 이어지면 ‘일상’이 된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1/06/08 14:45 수정 2021.06.08 14:45

서용태
인문연구공동체 로두스 대표
육군3사관학교 인문학처 강사
지난 글에서 제도권 역사교육이 가진 문제점을 『쇄미록』을 인용해서 지적했다. 이번 글도 『쇄미록』을 통해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일상을 살아간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볼까 한다. 지난 글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쇄미록』을 간단히 소개하겠다. 『쇄미록』은 16세기를 살던 평범한 양반 오희문이 임진왜란을 전후한 9년 3개월 동안 쓴 일기다. 저자 스스로 ‘보잘것없는 사람이 떠돌아다니며 쓴 기록(瑣尾錄)’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임진왜란을 몸소 겪은 백성의 생생한 기록이라는 면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유성룡의 『징비록』이나 이순신의 『난중일기』 못지않은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됐다.

임진남행일록 1592년 11월 28일
술을 얻고 싶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는데, 마침 이광복이 잘 빚은 술 한 병을 사람을 시켜 보내왔다. 바로 따뜻하게 데워서 사발에 가득 따라 마셨다.

11월 29일
마을 소년들이 모두 모여서 종정도 놀이를 했다. 꼴찌를 한 자는 먹을 두 눈에 칠해서 웃음거리로 삼기로 했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 시작됐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삽시간에 영남지방을 휩쓸고 충청을 지나 불과 20일 만에 도성을 손에 넣은 뒤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치고 올라갔다. 당시 오희문은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를 전전하며 피란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의 11월 28일자 일기를 보면 전쟁으로 인해 술을 구하기가 어려웠음에도 술을 마실 사람들은 어떻게든 구해서 마셨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음날 일기에는 마을 소년들이 오늘날의 보드게임과 비슷한 종정도 놀이를 하며, 마치 주말 TV 예능에서나 볼 법한 벌칙을 정해 즐기는 모습이 담겨 있다. 전쟁의 긴박함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을 만큼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계사일록 1593년 6월 14일
오후에 덕민이 나에게 개장국을 보냈다.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오래 먹어 보지 못하던 차에 달게 먹었다. …… 소지가 사내종을 데리고 물고기 1바리를 잡아 와 회를 쳐서 먹으면서 소주 한 잔을 마셨다.

7월 19일
오늘 길에 농사 상태를 보니 장성, 광주, 나주를 거쳐 영암에 이르기까지는 벼와 곡식이 매우 잘 됐다. 올벼와 기장이나 조는 절반을 베어 먹었지만, 풍년을 기대할 수 있으니, 이곳 백성은 굶어 죽을 걱정을 거의 면할 듯하다.

8월 15일
누이가 아버지의 신위 앞에 술, 과일, 떡과 구이, 탕을 갖춰 차례를 지냈다. 오늘은 추석이다.


전쟁 2년차이던 1593년은 명나라의 참전으로 조명연합군과 왜군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강화회담을 시작하던 시기다. 일기를 보니 사람들은 평소처럼 개장국도 먹고 물고기를 잡아 회를 쳐서 술도 마셨다. 생업인 농사도 부지런히 지었고, 심지어 풍년이었다니 오히려 반갑기 그지없다. 추석 명절도 정성스러운 차례상도 빠뜨리지 않고 챙겼다. 일기의 배경이 된 장소가 전쟁의 참화에서 한 발짝 비켜난 호남지방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임진왜란 하면 7년간 지속된 전쟁의 참혹한 모습만 떠올린다. 모든 전쟁이 참혹하듯 임진왜란 역시 실제로 참혹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일상을 살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일상에 대해선 잘 모르는 것일까? 국가가 관장하는 제도권 역사교육은 국민통합 내지는 동원이데올로기로서의 역사를 강조하기 때문에 전쟁의 폐해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 이면의 일상은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비일상’이 오래 지속되면 ‘일상’이 된다.

학교와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았다고 해서 실재한 역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 전쟁이라는 ‘비일상’이 오래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그 속에서 서서히 ‘일상’을 찾아갔다. 그렇게 7년의 전쟁을 겪어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변화된 일상에 따라 사회의 모습도 바뀌어 갔다. 우리는 지금 이른바 ‘코로나 사태’라는 비일상을 2년째 겪고 있다. 오희문의 전쟁 2년차 일기에서 본 일상의 모습처럼 우리도 어느덧 코로나19에 그럭저럭 적응하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와 같은 개인위생에 철저해졌고, 학교와 회사에선 온라인강의와 재택근무가 자리를 잡았다. 어쩌면 코로나 사태가 진정된 이후로도 이러한 모습이 새로운 일상으로 완전히 정착될 수도 있다.

갑오일록 1594년 11월 17일
조사겸의 첩이 계집종 둘을 샀다가 도로 내놓았으므로 내가 무명 13필을 주기로 약속했다. 본래는 큰 짐 싣는 말 1필을 주면 되는데, 값이 무명 11필로 정해져서 2필이 부족하니 벼 1섬을 더 주었다.

을미일록 1595년 4월 27일
향비가 일이 있어 군에 들어오기에 앞서 그 남편의 본처에게 시기를 받아 옷이 다 찢기고 머리카락이 모두 뽑혔으며 뒤통수가 깨져 옷이 흥건할 정도로 피가 흘러 집에 누워 있다고 한다. 마침 군수가 없었기 때문에 향소에 고해서 그 본처를 잡아 가두게 했는데, 도망쳐서 잡지 못하고 그 어미를 가둔 뒤 군수가 관아로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시행착오가 다소 있었지만, 정부의 백신 접종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문을 닫았던 박물관, 도서관 등 공공시설들도 지금은 대부분 다시 개관하고 있다. 마침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쇄미록』 기획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겸 자녀들과 함께 진주성과 촉석루를 돌아보고 오는 것을 독자들께 권하고 싶다. 진주박물관은 진주성 경내에 있다. 남강변 경치 구경과 야외 바람을 쐬는 것도 좋지만, 더불어 박물관에 들러 『쇄미록』 특별전을 관람한다면 위의 일기에서 보는 것과 같은 노비매매 방법, 부녀자들의 싸움과 처리 과정 등과 같은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당대의 생생한 일상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특별전은 8월 15일까지라 기간에 여유가 있고 관람료도 무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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