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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8] 때론 사라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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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8] 때론 사라지고, 근근이 살아지는 운명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1/06/18 14:03 수정 2021.06.18 14:03
책꽂이 투쟁기/ 김흥식

이기철
시인
지난 칼럼에서는 ‘서재 결혼시키기’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이번에는 우여곡절 끝에 화학적 결합에 성공한 책에 대한 복잡 미묘한 사정을 말해볼 시점이다. 간단하게만 생각했던 책에 무슨 사연이 있길래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서재에 꽂히는 책도 주인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장식용이 되거나 쓰레기가 되거나 아니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두고두고 사랑받을 수도 있다. 이를 두고 ‘책꽂이 투쟁기’라고 말해도 좋다.

저자는 책을 만든 경험이 풍부하며 아끼고 사랑으로 함께하는 이라 그들이 어떻게 갈등하고 조정되고 발전해 오는지 명확히 알고 있다. 책도 오랜 세월이 빚어낸 산물이다. 따라서 그들끼리 얽히고설킨 복잡하고 고단한 역사가 있다. 오늘은 서재 혹은 책장,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 운명 혹은 변천사를 한 대목만 가려 살펴보자.

50대 이상은 문고본을 잘 알고 있다. 고객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출판되기도 했지만, 독서 인구 저변 확대라는 거창한 구호에도 걸맞은 기획상품이었다. 을유문고, 삼중당, 범우사를 비롯 삼성문화재단에서 기업문화활동 차원에서 출간한 삼성문화문고(200종가량 출간, 당시 출판계를 놀라게 했다) 등.

책꽂이 투쟁기 표지.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서점에서 문고본이 사라졌다. 이유가 있다. ‘그때’와 ‘지금’이라는 시간이 간섭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저작권 문제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고, 여러 종류 책들을 진열해야 팔리던 서점 사정도 있었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쉽게 망가져 버리는 페이퍼백을 대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다만, 울림은 그다지 크지 않다. 지금은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사이즈를 따질 때가 아니다. 복잡한 계산이 그 안에, 이익이라는 문제를 감춰두고 있다. 수지타산(受支打算)이라는 복잡한 셈법.

문고본 천국이라 불리는 일본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이와나미문고(岩波文庫)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많은 줄 안다. 100년 넘는 출판사 이력이 말해주듯 문고본을 넘어 여러 종류 책들을 발간하고 있다. 우익 소굴 일본에서 시대정신을 그나마 가진 출판사다.

문고본이 숨을 할딱이며 생명을 다해갈 때쯤, 영자의, 아니 ‘전집의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가불(假拂) 인생에 더해 할부(割賦) 인생이 속출하던 시기다. 그 추억과 고통을 아직 가지고 있을 사람 많겠다.

책 모양새는 시대 변천사와 닮았다. 초기 메소포타미아 서판에서 시작된 책은 진흙, 파피루스, 양피지, 대나무 등을 재료로 태어났다 사라졌다. 지금은 환경을 걱정하면서도 나무를 죽여 만든 종이로 책을 만들고 읽는다. 책에 대한 책임까지 생각해야 하는 모순(矛盾) 시대.

책이 사각형 모양으로 제작된 시기는 서기 400년부터.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종이를 접는 형태로 공식화됐다. 프랑스에서는 1527년에 프랑수아 1세가 왕국 전역에 표준 종이 크기를 정하고 이 규칙을 어기는 자는 누구든지 투옥한다는 칙령까지 내린 바 있다.

유럽에서 커다란 크기의 책이 유행하는 것을 풍자한 귀스타브 도레 삽화. 어느 불쌍한 서기가 거대한 책을 옮기느라 낑낑대고 있는 모습.

책 크기는 언제나 고민거리다. 문고본이든 전집이든 단행본이든.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는 출판사 사정은 매번 손익계산서를 가늠할 수밖에 없고, 흔히 말하는 트렌드도 무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아주 무겁고 때론 권위를 내세우는 무거운 책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다. 19세기 프랑스 미술가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삽화를 보면 파리국립도서관에서 어느 불쌍한 서기가 거대한 책을 옮기느라 낑낑대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흔히 귀족들이 ‘가오 세우기’ 위한 책이었다.

우리나라도 두껍고 웅장하게 보이고 거만스러운 치장을 한 책이 등장했다. 이른바 ‘벽돌책’. 1990년대까지만 해도 단행본이 400페이지를 넘는 일은 드물었다. 원고량이 많을 경우 2, 3권으로 나눠 출간했다. ‘소설 동의보감’, ‘소설 토정비결’, ‘소설 목민심서’ 이른바 역사소설 등이 그러했다. 이 책들은 당시 100만부 이상 팔렸다. 이제는 분철(分綴)된 책은 의미가 없어졌다. 제작비, 유통비도 아껴야 하고 구매자도 불편해한다.

Quint Buchholz 작품, 책 등대.

왜 벽돌책이 등장하는가? 이유가 있다. ‘그래, 이 두꺼운 책에는 내가 찾는 보물이 있을 거야’라든지 적어도 지적 허영을 채우는 데 필요할지도 모를 심리도 포함돼 있을 게 분명하다. 고려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피네간의 경야 주해’는 1천141페이지에 달한다,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가 스스로 최고 걸작으로 꼽은 작품이다. 이 사람 책을 읽는데 필요한 해설서니 본 책은 얼마나 읽기 힘들겠는가? 2016년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세익스피어 전집은 1천806페이지다. 섣불리 집어 들 책이 아니다. ‘폼 잡기’는 좋지만. 벽돌책으로 한발 다가서려면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지만, 괜한 무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우스갯소리 삼아 ‘베개로 삼지’라고 말하면 위로가 될까?

니체는 ‘책은 도끼’라고 말한 바 있다. 무엇인가 찍어내는 역할을 맡은 도구. 책꽂이 투쟁기는 때론 사라지고 혹은 근근이 살아남은 책이 전해주는 서늘한 전설이다. 따라서 저자가 내뱉은 푸념은 그가 지녀온 독서 편력이자 ’젊은 날의 초상‘이란 화석(化石)이다.

필자 서재 벽돌책 일부.

Tip, 이 책은 누드 제본 방식으로 만들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기가 아주 부드럽고 수월하다. 읽다가 눌러두기 위해 문진(文鎭)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만지고 쓰다듬어 가며 읽다 보면 ‘누드’가 ‘무드’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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