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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피어싱과 타투를 금/허하라..
오피니언

피어싱과 타투를 금/허하라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1/07/06 16:00 수정 2021.07.06 16:03

서용태
인문연구공동체 로두스 대표
육군3사관학교 인문학처 강사
최근 정의당 국회의원 류호정이 이른바 ‘타투법’을 발의하며 국회 앞마당에서 자신의 등에 큼지막한 문신을 새기고(정확히는 스티커를 붙이고) 등장하는 퍼포먼스를 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류호정에게 청년 세대는 대체로 박수를 보내고, 기성세대는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듯하다. 필자 또래의 이제는 40~50대 기성세대가 된 X세대들도 1990년대에 비슷한 논란을 겪었다. 가수 고(故) 신해철이 귀걸이를 했단 이유로 방송 출연이 거부되면서 외모ㆍ복장 규제에 대한 찬반양론이 아주 치열하게 대립했다. 찬성측도 반대측도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논쟁의 결과는 ‘적당한 선’에서의 타협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논란은 2021년의 류호정과 1997년의 신해철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일까? 필자가 역사 선생이다 보니 옛 자료를 보며 얘기를 이어가겠다.

교서를 내리기를 “금ㆍ은은 본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므로 금후로는 궐내에서 쓰는 술잔 및 사신을 접대하는 그릇, 관리의 관대, 명부의 뒤꽂이, 사대부 자손들의 귀고리 등을 제외하고는 일절 사용을 금하며 범하는 자는 법령을 어긴 죄로 다스리겠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년 1월 6일자 기사다. 쉽게 구할 수 없는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 사용범위를 줄여 국가경제에 미칠 악영향과 과소비를 막겠다는 조치인데, 특이하게도 허용 범위에 사대부 자손들의 귀고리가 들어있다. 이는 당시 사대부 자손들이 귀고리를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내명부’ 혹은 ‘사가의 여인’이 아니라 ‘사대부의 자손’이라 한 것을 보면 여성들만 귀고리를 한 게 아닌 듯하다. 우리는 역사책과 박물관을 통해 고대 왕릉에서 출토된 장신구들 중에 귀고리가 다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 즉, 고대 우리 선조들이 귀고리를 한 사실을 알지만,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사대부들도 귀고리를 했던 사실은 잘 모른다. 사료를 더 들여다보자.

판의금부사 이손이 아뢰었다. “강수의 나이 9세인데 큰 진주 귀고리를 달았고 백회에 뜸 뜬 흔적이 있었으니 이로써 증거 대어 보면 즉각 진위를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비록 양평군이더라도 나라를 속이고 도망가 있었으니 어찌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단단히 가두고 추핵하소서” - 『조선왕조실록』 중종 8년 1월 7일

위 중종실록 기사에 나오는 양평군(강수)은 연산군의 후궁 소생으로 중종반정 이후 유배돼 죽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사료를 통해 여성들뿐만 아니라 9살 남자아이도 귀고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왕손의 신분임에도 버젓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았단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귀고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나 우려가 없었던 것일까? 사림세력이 집권하고 성리학이 완전히 정착된 16세기 이후가 되면 불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나라의 풍속에 남녀가 어릴 때 귀밑에 구멍을 뚫고 귀고리를 드리우는 오랑캐의 습속이 전래되었으되 아직 이를 고치지 않더라. - 윤국형 『문소만록』

『장자』에 말하기를 천자를 모시는 여인들은 귀를 뚫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체로 귀를 뚫어 귀고리를 다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하였던 것으로 홀로 우리나라만의 풍속은 아니다. 옛 제도를 모방하였을 뿐이다. - 이수광 『지봉유설』

위 기록을 통해 보다 분명히 조선시대에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았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성리학자들의 눈에는 그것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윤국형은 오랑캐의 습속이라 비난했고, 이수광은 그저 옛 제도를 모방했을 뿐이라 하면서도 천자의 나라에서는 귀를 뚫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결국은 나라에서 법으로 귀고리를 금하기에 이른다.

젊은 사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 하는 풍조를 금하도록 하다. 신체와 발부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초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사내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에게 조소를 받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이후로는 오랑캐의 풍속을 일체 고치도록 중외에 효유하라.- 『조선왕조실록』 선조 5년 9월 28일

선조 대에 이르러 귀고리 착용을 법으로 금지한 표면적 이유는 ‘신체발부(身體髮膚) 수지부모(受之父母)’라는 유교적 이념과 오랑캐의 습속을 따른다는 중국인들의 비난 때문이었다. 두 이유 모두 당대 사대부들의 입장에서 충분히 제기할 만한 우려였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위 선조실록에서는 단속 대상을 콕 집어서 ‘젊은 사내’라고 했다. 성리학이 몸에 밴 기성세대의 눈에는 젊은이들의 귀고리 착용이 요즘 청년들이 말하는 ‘B급 문화’ 혹은 ‘저급 문화’로 보였고, 무엇보다 오랑캐에게서 유래한 습속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따르는 모습이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젊은이들의 그릇된 일탈행위로 여겨졌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는 물론 서양에서도 몸에 구멍을 내어 귀걸이 등의 장신구를 착용하거나(piercing) 피부에 바늘로 찔러 염료를 주입해 글과 그림을 새기는 것은(tattoo) 몸에 대한 가학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상식을 추구하는 사회 일반의 인식과 동화되기 어려웠다. 몸에 구멍을 내거나 문신을 새기는 행위가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데에는 그것을 하는 계층에 대한 편견도 자리 잡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주술적 의미에서 시작이 됐기에 문명과 거리가 먼 원시부족이나 하는 미개한 행동이라는 인식도 있었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남성의) 귀걸이 착용과 문신에 대해 터부시했던 것은 그것을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젊은이들의 일탈행위나 무분별한 외래문화 유입 혹은 범죄자(주로 조직폭력배)의 표상으로 봤던 사회적 시선이 그대로 반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탈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상징이나 다름없었고, 사회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했던 귀걸이와 문신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다. 요즘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젊은이가 자기 개성의 표현 수단으로 이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문신은 더 이상 조폭의 전유물이 아니며, 귀뿐만 아니라 코와 입술 심지어 배꼽도 뚫는다. 이제는 일종의 청년문화가 된 듯하다.

지금 우리는 더 이상 “귀를 뚫지 마라”, “문신을 새기지 마라”고 강요할 수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문화의 새로운 현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견해가 생겨나게 마련이고, 그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오직 개인의 판단과 자유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제는 몸에 구멍을 내고 문신을 새기는 것에 대한 찬반이나 개성의 표현은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하는 얘기들은 그야말로 진부한 논쟁거리가 돼 버렸다. 꼰대 소릴 들을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여전히 문신과 귀걸이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가지고 있어서 내 자식이 한다면 말릴 것 같다. 몸에 구멍을 뚫거나 피부에 바늘로 찌르는 행위는 준의료행위다. 그래서 이제는 개성과 표현을 논할 것이 아니라, 의료와 위생의 문제를 논의해야 할 때다.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염증성 질환이나 감염병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부차적으로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의료법 위반 문제도 논의해야 한다.

정의당과 류호정에 대한 정치적 입장과 호불호를 떠나 어쨌든 그에 의해 이슈화가 됐으니 이번의 일회성 퍼포먼스에 그치지 않고 활발한 후속 논의와 현실적 조치들이 나올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용어에 대해 사족을 하나 달고 마무리해야겠다. 류호정은 이번 법안을 발의하면서 국제적인 통용어이기 때문에 ‘타투’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의하기 어렵다. ‘문신’이 당한 의문의 1패에 대해선 다음 글에서 다뤄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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